Sentence Addiction






* 이 글은 324화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청명한 하늘이었다. 대한민국에 사계절이 사라졌다 떠들어댔던 게 무색할 만큼 높고 푸른 하늘 아래 가을 햇살이 따스했다. 상쾌하리만치 기분 좋은 공기. 발걸음을 옮기며 팔을 들어올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5시 36분, 많이 늦지는 않았군.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주머니 안에 밀어넣으며 가게의 문을 열었다.


 "오! 사부~!"

 "늦었다, 유중혁. 지각비 내라."

 "지각비보다 더 재밌는 거 있지 않아요? 입장샷 같은 거?"

 "아, 요즘은 로그인샷이거든요. 나이 티난다, 누나."

 "일단 앉아요, 대장. 빨리, 빨리."


 왁자하게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들. 피식 웃으며 일행들이 비켜주는 대로 적당히 사이에 끼어 앉자 대뜸 손에 소주잔이 쥐어진다. 뭐지? 하는 눈으로 쳐다봤더니 악마 같은 웃음을 짓는 한수영의 얼굴이 보였다.


 "모르는 척 마시지. 자, 로그인샷 함 가자!"

 "함가~!"

 "함가함가!"


 뭔 헛소리들인지. 고작 6분 늦은 걸 가지고. 어이가 없었으나 일단은 내가 제일 늦게 도착한 건 맞는 듯해 묵묵히 잔에 따라지는 소주를 바라봤다. 평소엔 매번 늦던 인간들이 이번에는 왜 이렇게 일찍들 모여 있는 건지. 얼굴들을 보니 벌써 최소 한 잔씩은 한 모양새다. 마셔! 마셔! 하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입안에 투명한 액체를 털어넣었다. 씁쓸하게 혀를 달구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뜨끈한 감각. 잔이 넘치도록 신나게 따르는 바람에 손가락에도 조금 묻어난 소주를 털어내며 잔을 내려놓았다.


 "캬, 시원시원하다!"

 "쓸데없이 멋있네. 빡친다……."

 "중혁 씨는 나이를 먹을수록 멋있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덕담 고맙군."


 적당히 대꾸하며 둘러앉은 일행들의 얼굴을 차분히 바라봤다.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얼굴들. 시나리오의 결말을 본 뒤, 2018년으로 시간이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 세계선에서 그대로 지구가 복구되는 바람에, 다들 나이를 먹은 상태 그대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다들 술집에서 모이기도 할 수 있게 되었지. 그 어렸던 신유승과 이길영도 성인이 되어버렸다. 훌쩍 자란 그 얼굴들을 새삼스럽게 바라보고 있자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독자 씨는요? 같이 안 왔어요?"


 가벼운 통증이 총알처럼 관자놀이를 꿰뚫고 지나갔다. 편두통이 또 도졌나. 손을 들어 뭉근하게 문지르며 여상히 대꾸했다.


 "일이 있다더군. 아마도 어머니를 만나러 간 것 같은데."

 "아쉬워라. 하필이면 일정이 딱 겹쳤나봐요."

 "김독자 치사한 놈. 이렇게 다 같이 모이기가 쉬운 줄 아나."

 "맞아요. 정말 어렵게 다들 시간 맞춘 건데."


 김독자 컴퍼니라는 이름이 무색하잖아요. 아저씨 보고 싶다……. 나중에 보면 가만 안 둬. 그런 말들이 어지럽게 오갔다. 빈 소주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잔을 채웠다. 그 희멀건 얼굴을 잠시 떠올리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든다. 분명 집을 나서는 뒷모습을 배웅까지 했는데. 잘 다녀오라고 마른 어깨를 붙들고 뺨에 입을 맞췄던 것까지 기억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시는 못 볼 것처럼 불안한 걸까.


 팔을 붙드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신유승이 조금 걱정 어린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장. 왜 그래요?"


 커다란 눈동자가 깜빡이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다. 그렇게 말하며 잔을 들어 다시 입안에 털어넣고. 하지만 옆얼굴에 붙은 시선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며 팔짱을 꼈다.


 이내 불판이 올려지고 여기저기서 고기를 굽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보니 다들 빈 속에 술부터 밀어넣고 있었군. 술이 약한 사람들도 꽤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큰 사고를 낼 사람들은 아니지만……. 잠시 바라보다가 자기가 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는 이길영에게서 집게를 뺏어들어 고기를 구웠다. 조금 투덜거리나 싶더니 금방 신유승과 투닥거리기 시작한다. 여전히 사이가 안 좋군. 아니, 사이가 너무 좋다고 말해야 하는 건가. 그 옆에서는 유상아와 이현성, 이설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회사가, 병원이, 군대가…… 직장 생활 푸념들이다. 반대편에서는 한수영과 이지혜가 정희원의 지도 아래 신나게 술을 말아대고 있었고. 저러다 훅 가지.


 나는 말없이 주변에서 쏟아지는 이야기의 홍수에 귀를 기울였다. 각자의 삶을 살아나가는 인간들의 대화. 이야기의 세계는 멸망했으나, 이곳에서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존재가 살아있는 한 거부할 수 없는 어떠한 흐름 같은 것이겠지. 문득 들려오는 잔이 비었다는 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더 안 마신다, 김독자가 기다려서. 그 대답에 팔불출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한 귀로 흘렸다. 그 뒤로도 간혹 걸어오는 말들에 적당히 대꾸해 주었다. 이제 슬슬 노안 오지 않았냐, 은퇴할 때 안 됐냐는 한수영의 헛소리에는 눈썹만 까딱여 주고.


 "중혁 씨."


 문득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이설화가 묵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이자, 잠시간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입을 연다.


 "지금, 행복해요?"


 까각. 젓가락을 쥔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재빨리 힘을 풀었으나 이설화는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어느새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행복, 행복이라. 얼마만에 들어보는 말일까. 나는 손아귀에 잡혀 있는 쇠젓가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전 같으면 진작에 휘어지고 부러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을 연약한 쇳조각을.


 이렇게 살아왔었고, 살아남았었다. 생존을 위한 수많은 시간들. 그 끝에 있을 것에 대한 기대는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 마치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잠시 잊고 살았던 지금처럼.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늘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너무나 많이 생각했기에 의미가 퇴색된 것.


 천천히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눈을 들어올려 이설화를 바라봤다가, 그대로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이길영. 유상아. 이현성. 신유승. 이지혜. 정희원. 한수영. 결말을 함께한 동료들. 이어서, 이 자리에는 없으나 등을 맡겼던 모든 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또한 이 손에 죽어나갔던 수많은 생명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김독자를 생각했다.


 하얀 얼굴. 밤하늘 속에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나를 향해 팔을 벌리던 몸짓, 부서지는 미소. 그리고 끝내는 내 품에 안겨오던 미지근한 체온, 곁에 있겠다는 약속, 그런 것들을.


 "행복하다."


 입가에 자연스레 웃음이 걸렸다. 이것을 행복이라 부르지 않으면, 세상 그 무엇이 행복이라는 말인가. 수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결국은 여기까지 왔다. 과정은 고되었을지언정 끝은 해피엔딩이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여기에 있고, 김독자는 내 곁에 있다. 그러니까 그 모든 일들은, 결코 의미 없는 일들이 아니었다고.


 나는 지금 아주 행복하다고.



*



 "어. 왔냐."


 조금은 퉁명스러운 인사가 들려온다. 역시나 먼저 돌아와 있었군. 미안하다, 차가 막혀서. 아, 예. 그러시겠지. 툴툴대는 목소리에 피식 웃으며 신발을 벗어두고 거실로 들어섰다. 한 면이 통째로 유리로 된 벽 앞에 서서 등을 보이고 있는 녀석. 그 어깨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작았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옅은 안도감이 몸을 감쌌다.


 "놔."

 "삐졌나, 김독자."

 "삐진 거 아니거든!"


 왈칵 소리를 뱉어내며 인상을 쓴 채 뒤돌아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 기다란 속눈썹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눈가에 입을 맞췄다.


 "내가 잘못했어.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제대로 된 사과의 말을 입에 올리자 표정이 조금 느슨해진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옆에 잠시 내려뒀던 쇼핑백을 들어올렸다.


 "뭔데?"

 "와인."

 "너 술 안 좋아하잖아?"

 "와인이 술인가?"

 "그것도 술은 술이지……."


 그래서, 싫어? 되묻자. 그런 건 아니고…… 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그럴 거면서. 작게 웃고 뺨에 다시 입을 맞춘 뒤 쇼핑백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안주라도 준비할 테니까 잠깐 기다려. 어? 어……. 쇼핑백을 부스럭거리며 열어보는 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참치 카나페 정도로 할까, 원래 같으면 빵도 직접 구웠겠지만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과자로 대신하기로 했다. 납작한 과자가 든 봉지를 뜯으며 흘끗 거실을 보자 와인병을 꺼내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보고 있다. 역시나 술과는 거리가 먼 인간답군. 짧은 상념을 털어내고 금방 카나페를 만들어 접시에 담아 내갔다.


 "오. 카나페 오랜만이네."

 "먹어봐."


 참치와 토마토를 함께 올리는 게 정석일 테지만 토마토를 싫어하는 녀석을 위해 치즈와 햄, 옥수수로 대신했다. 오프너로 와인병을 열고 함께 가져온 잔에 적당히 따라 하나를 앞에 놔 주었다. 카나페를 집어먹던 녀석이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히고 웃었다.


 "분위기 있는데?"

 "중요한 날이니까."


 내 말에 멈칫하고 와인잔을 집어들려던 손을 멈춘다. 손으로 부스러기를 닦아주니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에서 말하지 않아도 의문이 흘러들어온다. 알고 있었어?


 "당연히 알고 있었어. 나랑 이렇게 1년이나 지냈으면서 아직도 나를 모르나, 김독자."

 "뭔 소리야. 너를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건 나거든. 너 자신보다도 더 잘 안다고."

 "또 그 소리."


 픽 웃으며 와인잔을 들고 옆자리에 붙어 앉았다. 미미하게 긴장한 듯 몸을 똑바로 세우는 것이 느껴진다. 새삼스럽게. 녀석의 와인잔도 집어 하얀 손에 쥐여주고, 잔을 살짝 맞부딪혔다.


 "1주년 기념일."

 "……."

 "고맙다, 김독자. 나랑 같이 있어줘서."


 눈을 들여다보며 말하자 뺨이 조금 달아오르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늘 세상사 다 겪은 닳은 인간처럼 굴면서도, 가끔 이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는 게 얼마나 귀엽던지. 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와인을 조금 머금었다. 천천히 목으로 넘기자 마찬가지로 와인을 마시는 옆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맛있네, 이거. 많이 마시지 마라. 취한다. 와인 정도로 안 취하거든. 그래? 조금 장난기가 돌아 입에 와인을 머금은 채 녀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왜 그래? 물어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녀석의 손에 들린 와인잔도 뺏어 옆에 나란히 내려두고. 그대로 입술을 겹치자 눈을 꼭 감는다. 느릿하게 입을 열어 머금었던 와인을 흘려보내니 달착지근하면서 쌉쌀한 와인의 향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하아, 밭은 숨을 뱉으며 입술을 떼어내더니 눈을 깜빡인다. 이내 씩 웃는 얼굴. 유중혁 완전 선수야 이거. 장난 아냐. 그걸 이제 알았나? 사랑스러운 얼굴을 느긋하게 웃으며 바라보자 녀석이 제법 진지한 얼굴을 해왔다.


 "중혁아."

 "왜."

 "다른 사람들은 잘 지내?"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카나페 하나를 입에 넣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모임 자리에서 들은 일행들의 근황을 들려주었다. 시간이 엉망으로 꼬인 바람에 이지혜와 이길영, 신유승이 모두 대학 신입생이 되었더군. 서열 정리 힘들다고 한참을 투덜댔다. 유상아는 요즘 프랑스어를 배운다고 한다. 이번엔 온전히 흥미로. 이현성은 잃어버린 물건을 기록하는 수첩을 만들었다고 했고, 한수영은 새 글을 쓰고 있다더군. 이설화는 교수가 됐다. 정희원은 조만간 자기 가게를 낼 예정이고. 추임새를 넣어가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녀석이 소리내서 웃었다.


 "다들 잘 지내는구나. 다행이다."

 "하나같이 네가 보고 싶다고 보챘다."

 "어쩔 수 없었어. 나도 가고 싶었다고."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을 하기에 더 말을 얹지 않고 와인을 조금 마셨다. 여전히 나를 물끄러미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더 궁금한 게 있는 건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대단히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연다.


 "유중혁."

 "응."

 "너는…… 지금 행복해?"


 나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나왔다.


 "오늘따라 내 행복 지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군."

 "그래? 아니, 어쨌든 대답해 봐. 행복해?"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조금은 절박해 보였다면, 내 착각일까. 나는 그 하얀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술에 입을 맞췄다.


 "행복한 게 당연하지 않나."

 "……."

 "네가 여기에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자, 조금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눈을 접으며 웃어보인다. 나는 손을 들어 그 눈가를 쓸었다. 어째서 그런 얼굴을 하지. 녀석은 대답이 없었고, 나는 재차 이름을 불렀다.


 "김독자."

 "응?"

 "너는 생각보다 얼굴에 티가 많이 난다. 그러니까 나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


 하하 웃는 공허한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이내 시선을 조금 피하더니,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중혁아."

 "그래."

 "나는 내가 이렇게 살 거라곤 생각 못 해봤다."


 갑자기 무슨 소릴까.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쳐다보자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아니, 이상한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중혁아."

 "응."

 "나는 지금…… 엄청 행복하거든."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떨궈 제 손을 내려다본다. 행복하다고 말하면서 표정이 왜 그러지. 손가락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고 있기에 손을 뻗어 잡아주니 후우, 하고 깊은 숨을 내쉰다.


 "나는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몰랐어. 단 한 번도. 너도 이제 알지?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를 찌른 살인자였고, 그걸로 에세이를 썼고……."


 느리고 신중하게 이어가는 말은 감정을 누르려는 듯 조금 메말라 있었다. 나는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사실 그 아버지를 찌른 게 나고. 물론 사고였지만, 그렇지만…… 어머니는 나를 위해 다시 읽기를 하셨고. 또……"


 무언가 더 말하려던 입술이 멈춘다. 잠시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더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똑바로 마주해온다.


 "중혁아."

 "듣고 있어."

 "말로는 도저히 못 하겠다."

 "……."

 "그러니까…… 보여줄게."


 그렇게 말하며 긴 손가락이 내 뺨으로 뻗어온다. 그대로 피부에 닿는 순간, 거대한 활자의 흐름이 그 팔과 손가락을 타고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어떻게?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곳은 더 이상 <스타 스트림>의 세계가 아니다. 그로부터 해방된, 스킬이나 특성같은 것은 없는 세계일 텐데. 놀라서 입을 벌리자 희뿌옇게 웃는 녀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십여 년 이상의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꽂아넣어졌다.


 아주 어렸던 시절, 피투성이가 된 어린아이의 손과.

 학창시절, 지독하게 저를 괴롭히던 집요한 폭력과.

 친척집 현관문 앞에 서서, 차마 문고리를 돌리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던 외로운 기억.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탱해주던 유일한 구원.

 그것은 하나의 소설이었고, 동시에…… 나였다.


 으, 나도 모르게 조금 신음성을 내며 머리를 부여잡자 재빨리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온다. 괜찮아? 눈꺼풀을 수차례 깜빡이고선 녀석을 바라봤다. 물론 괜찮지 않았다.


 이런 기억을 보고,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그 눈을 바라봤다. 언제나 빛을 잃지 않던 그 눈동자는 지금도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조금은…… 예상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말없이 진실을 수긍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눈앞에 있는, 한없이 외로운 인간에 대해서.


 오랜만에 감정이 울컥하고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대로 녀석을 품에 끌어안았다. 성마른 어깨를 매만지고 토닥이며. 김독자. 응, 중혁아. 나는……. 괜찮아. 아무 말 안 해도. 하, 조금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누가 누굴 위로한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도저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말주변이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그런데도. 그저 그 몸을 부서져라 껴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중혁아."

 "……."

 "유중혁, 나 좀 봐봐."


 고개를 살짝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옅은 미소를 걸친 새하얀 얼굴. 녀석은 그대로 내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중혁아. 고맙다."

 "김독자……"

 "그러니까 이제…… 가야 해."


 가다니?


 "어딜 말이지……?"

 "돌아가, 유중혁."

 "돌아가라고?"

 "눈을 떠.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멋대로 끌어들여서 미안하다."

 "무슨 소릴,"

 "지금 본 건 잊어줘. 네 미래에 나는 없을 테니까. 제4의 벽, 이 녀석이 또 멋대로 일을 벌였지 뭐냐."


 내가 여기에 있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말야. 멋쩍게 웃는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그게 대체 무슨……"

 "중혁아."


 물기 어린 미소가 허공에 흩어졌다.


 중혁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제4의 벽'이 말합니다. '유중 혁 일 어나'」



*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가른다. 일순간 중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대체? 그리고 점차적으로 기억이 돌아왔다. 그래, 우리는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달했다. 그리고 클리어 조건을 본 나는 완수를 거부했고, 화를 냈고, 소리를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절대 동의해주지 않았다.


 '유중혁, 나를 죽여.'

 '개소리 하지 마!'

 '나를 죽여줘. 중혁아.'

 '김독자, 나는 절대로……'

 '제발 부탁이야.'


 나는 웃기지 말라며 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곧바로 내 손에 얹어진 녀석의 손으로부터 글자들이 나를 집어삼킬듯 몰아쳐왔고, 그래, 꼭 조금 전 꿈속에서 봤던 것처럼……. 그건 뭐였을까. 사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김독자가 바라는 나의 행복이었으며.

 동시에, 김독자 자신이 꿈꿨을 어느 미래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녀석이 원하는 행복한 결말에 닿는 곳. 눈앞에는, 너무나도 선명한 얼굴을 두고.


 "김독자."

 "응."

 "김독자."

 "응, 중혁아."


 우리는 끝없이 하늘로 추락하고 있었다. 등 뒤의 창공에는 거대한 그레이트 홀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뒤집힌 중력 덕에 아득한 서울의 폐허가 밤하늘처럼 머리 위로 펼쳐졌다. 늘 야경이 아름답던 도시, 불야성의 서울. 더 이상 도시의 구실을 하지 못할 만큼 철저히 무너진 대지였지만 이상하게도 이 순간만큼은 앞다퉈서 반짝이는 빛을 점등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언젠가의 밤, 세계가 지금처럼 뒤집어지기 전에 높은 고층빌딩 베란다에서 내려다봤던 풍경이 이러했을까. 쨍그랑. 와인잔이 깨지고 안에 들어있던 붉고 검은 액체가 흥건하게 쏟아져 떠오른다. 익숙한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하늘로,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투명한 물방울들도 함께 비산하는 걸까.


 "중혁아. 울지 마."


 눈가에 닿는 손가락이 서늘하다. 도시의 불빛을 배경으로 빛나는 새하얀 뺨이 온통 새카만 옷차림과 대비되어 눈이 부셨다. 그 주변으로 검붉은 액체들이 방울져 피어오른다. 스쳐지나가는 공기의 흐름에서 와인과 닮은 짙은 혈향이 느껴졌다. 그 속에서 말갛게 웃어보이는 칠흑같은 눈동자. 울지 마. 너야말로 울지 마라. 나는 안 우는데? 울고 있잖아.


 손을 뻗어 하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한 줌도 되지 않는 가느다란 목덜미가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가냘펐다. 부서져내리는 설화들이 별자리처럼 하늘을 수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지로 눈가를 쓸어봐도 건조함만 묻어나올 뿐이다. 이젠 알고 있다. 이 녀석은, 이런 표정을 하고 있을 때 누구보다도 많이 울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여기에 와 버렸고.

 이것은, 어떤 이야기의 서글픈 엔딩이리라.


 "김독자. 네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래?"

 "그래."

 "마지막이니까 인심 써서 들어줄까. 어디, 해 봐."


 씩 웃어보이는 얼굴에 가슴이 짓뭉개지듯 아파온다. 그 위로 상처투성이의 어린 모습이 겹쳐졌다. 작고, 여렸고, 세상에 자신의 편이라곤 없던 외로운 사람의 얼굴. 그리고 이제는. 나를 위해, 세계를 위해…… 다시 혼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의 얼굴.


 "시나리오가 모두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뭔데?"

 "예언자 김독자도 모르는 게 있는 모양이지?"

 "내가 아는 건 딱 시나리오의 마지막까지라서."

 "평범하게 늙어가고 싶었다."

 "……."

 "너와 함께."


 눈꺼풀을 깜빡이며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바라본다. 그러더니 이내 눈을 접어 웃었다.


 "아주 소박한 소원이네."

 "……."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겠지만."


 알고 있어. 하지만 네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마. 제발. 아주 짧게 그 입을 틀어막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입을 막는다고 진실이 막아지지는 않을 터였다. 녀석도, 나도, 그런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잔인한 말을 할 거였으면, 그런 꿈도 보여주지 말았어야지.


 나는 희망에 익사한다. 순간 보았던 짧은 미래의 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늘 나를 절망시켰던 것은 어떠한 희망의 조각이었고.


 나는 녀석의 손가락을 얽어 잡았다.


 "김독자."

 "……."

 "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초월좌, '존재증명을 거부한 자'가 마왕 '구원의 마왕'을 바라봅니다.]


 녀석의 얼굴에 짧게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중혁아. 너 뭐 하는……"


 [초월좌, '존재증명을 거부한 자'가 마왕 '구원의 마왕'의 배후성 선언을 합니다.]


 충격으로 확장되는 눈동자. 그런 얼굴 하지 마라, 김독자.


 [초월좌, '존재증명을 거부한 자'가 자신의 화신에게 '성흔'을 하사했습니다.]


 마왕의 배후성 선언이라니, 평소같으면 제대로 돌아갔을 리 없는 전개다. 하지만 끝에 다다른 시나리오는 이미 개연성의 의미가 흐려진 상태였다. 역시나 예상은 적중했고.


 나의 성흔인 '회귀 Lv.3'.

 그것은 이제, 김독자에게도 깃들었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이 잔뜩 고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는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고작 세 번의 회귀로도 인간성이 마모되었던 나다. 그리고 이 녀석은 내가 1863번이나 회귀하며 망가져 가는 걸 지켜본 유일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받아들여라. 김독자."

 "……중혁아."


 물기 어린 목소리가 허공에 부서진다. 나는 그대로 팔을 뻗어 그 몸을 끌어안았다. 세계를 구하는 대가로 스킬도, 설화도, 코인으로 강화된 스탯도 모두 잃은 마른 어깨를 갈무리해 품에 넣듯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그 어깨에 몇 번이나 기대고 구원받았는지 모른다. 김독자, 너는 알고 있나.


 해야 할 말이 많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고백은, 초라한 내 진심은 겨우 이런 것뿐이라고. 오직 너와 함께 걸어가고 늙어가는 것만이 내 바람이었노라고. 나를 전부 다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했노라고…….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말들이 필요할까. 네가 지켜낸 세계가 부서져내린다. 그리고 또한 네가 지켜낸 존재인 나는, 네 뜻을 받아들여 세계를 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도 받아들여."


 내 행복을 위해선, 너라는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중혁아, 나는,"

 "만나러 가겠다."

 "……."

 "수백 번, 수천 번이라도 너를 만나러 가겠다. 수만 번이더라도 상관없다. 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김독자. 나는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란 것을."


 그러니까 제발.

 이대로, 사라지지 말라고.


 이 세계는 네게 빚을 졌고, 나 또한 그렇다. 나는 네게 구원받았고, 너는 내게 구원받았다 말했지. 절망에 몸부림치는 서로의 멱살을 끌어올리며 여기까지 왔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렇기에.


 네가 회귀하면, 나도 회귀해서.

 그렇게 영겁의 시간을 함께하겠다고.


 그것이 우리의 방식일 터였다. 이 짧은 생을 다 써도 분명히, 우리에겐 짧을 테니.


 목덜미를 끌어안는 손길과 함께 입술이 겹쳐졌다. 그제야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적셨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잇새로 스며들고. 김독자, 사랑한다. 속삭임조차 눈가를 빛내며 흩어진다. 이내 힘을 잃은 몸이 천천히 내 품으로 스러져오는 것이 느껴졌다. 손안에서 꺼져가는 눈부신 생명. 애처로운 반짝임을 바라보며, 나는 가슴 깊이 그 빛을 새겼다.


 서글픈 맹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