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28. 02:21
얼굴 없는 얼굴에게 영혼 없는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며 밤 없는 밤을 건너듯 마음 없는 마음을 복기한다 사랑을 위한 사랑은 하지 않기로 시를 위한 시는 쓰지 않기로 사선에서 시작해서 사선으로 끝날 때 연약함을 드러낸 얼굴을 만난 적이 언제였나 결국 거울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방을 지나 안개 자욱한 거리로 나선에서 시작해서 나선으로 끝날 때 쉼 없는 쉼을 갈구하며 구원 없는 구원에 관한 장면을 떠올린다 사라지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것을 보듯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을 보듯이 사라지는 것을 내내 되살리기 위해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 너에게서 얼굴을 지워버렸다 얼굴 없는 얼굴 아래 이름 없는 이름을 새겨 넣고 기억 없는 기억의 온기 속으로 구름 없는 구름의 물기 속으로 입자와 파동의 형태로 번져나가는 관악기의 통로를 여행하듯 걸어간다 걸어간다 그저 지나치듯이 지나치듯이
― 이제니 作, <구름 없는 구름 속으로>
소년에게는 몹시 아끼는 글이 있다. 책의 두께를 헤아려본 적은 없었지만 글자의 수와 자신이 소중하게 그은 손가락의 면적은 기억하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다소 유치한 제목의 소설은 이미 3년이 넘도록 인터넷에서 연재 중이다. 소년은 매일 수업이 끝나면 피시방으로 달려가 남들이 게임 캐릭터를 향해 총을 쏘는 소리나 가상의 차를 운전하는 소리 따위를 들으며 한 자 한 자 아껴 읽었다. 언젠가부터 이 소설의 조회수는 늘 1 뿐이었다. 혹여 작가님이 실망해 그만두기라도 할까, 불안에 휩싸인 이 소설의 유일한 독자는 피시방 한 시간 600원이라는 금액이 제게 얼마나 귀중한지 알면서도 매일 소비했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온 후로는 다행히 상황이 바뀌었다.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나왔고, 미성년자인 그의 보호자를 자청하는 친척들은 특별히 그의 핸드폰을 바꿔주었기 덕분에 더 이상 피시방에 가질 않아도 괜찮았다. 이제 소년은 길을 걸으면서 소설을 읽는다.
그는 이 긴 제목의 소설을 줄여서 ‘멸살법’이라고 지칭했다. 기실 무엇이든지 줄여 부르는 방법이야 각자의 재량이라지만, 소년에게 이는 조금 특별한 느낌이었다. 누구도 보지 않는 가장 소중한 것에 붙여준 애칭이다. 자신만이 부르는 애칭은 책상 서랍 가장 깊숙이 꽁꽁 숨겨둔 보물상자와도 같았다.
종종 소년은 자문하곤 했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 소설을 사랑하는 걸까.
표지(表紙)조차 없는 이 소설은 어떻게 내 삶의 표지(標識)가 되어주는 걸까. 솔직히 멸살법이 재미있냐고 묻는다면, 흠. 자신 있게 “그렇다.”라 대답할 수 없다. 편당 분량은 몹시 길지만 묘사와 설정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장황하여 가독성이 떨어진다. 전개는 참신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사이다’가 드물다. 매 번 주인공은 역경에 부딪친다. 수십 번, 아니, 오늘 올라온 편까지 더하면 223번이 훌쩍 넘는다. 주인공은 인간의 기준으로는 먼치킨이지만 우주에서는 고작 티끌이다. 언제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죽음을 맞이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 주제에 때로는 멍청한 결정을 내리곤 때론 외벽이 오기도 전 스스로 걸음을 무너뜨린다.
그럼에도 이 독자는 결국 성경처럼 글을 읽는다. 글의 주인공을 본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유중혁이다. 소년과는 달리 이름도 멋지고, 본 적 없는 얼굴도 굉장히 잘생겼다. 그는 이미 수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이 실패는 한 번의 성공을 위한 실패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주저앉지만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선다. 먹먹한 벽도 언젠가는 뛰어넘는다.
소년은 그것에 매료되었다.
유중혁이 가지게 된 최초의 신념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는 달리 부딪친다. 자신의 밖에 있는 수많은 시선들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기어코 그 시선들마저 매서운 칼날로 잘라내려 든다. 자신은 하지 못한 것들을 그는 해낸다. 멸살법의 세계는 결코 희박한 빛 한 줄기 내려준 적이 없지만 유중혁은 스스로 빛이 된다.
사람인 적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독자는 몇 번이고 늘어놓았다.
그것이 못내 부럽고 뿌듯해서. 자신이 유중혁이었으면 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쉼을 멸망하는 세계로부터 찾아 말했다. 픽션의 이야기였다. 단칸방 안에 갇힌, 그에게는 언제나 잔인했던 어미를 보러갈 적에도 늘 거짓된 이야기를 했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돌아가는 길에도 활자를 읽었다. 유중혁이 왜 웃는지 알아보고 이 다음에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유추했다. 실재하지 않는 세계라도 괜찮았다. 구름보다 먼 공중이라도 좋다.
그 거짓이 소년의 전부였다.
유중혁은 내가 값을 지불해서 소중히 품에 끌어안고 소유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전자의 배열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영영 가지지 못할 당신이, 실제로는 바라보지도 못할 거뭇할 등을 곧게 핀 채 걸어가 주었으면 했다. 만인에게 축복받길 원한다. 무기를 버리고 웃기를, 소원을 이루기를.
독자는 늘 유중혁이 행복해지는 상상을 한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전부 가진 그 -사람인 적 없는- 사람이, 이번에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져주길 바란다.
그의 곁에 있는 다정한 사람으로부터 구원 받길 원한다. 나는 오직 하나, 사랑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는 행위밖에 해주지 못하지만. 자신이 매일 읽는 글의 마지막 편에는 그가 모든 긴장을 풀고 멸망 아닌 탄생을 끌어안고 모든 시선으로부터 해방되어 잠들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리하여 소년은 먼지 낀 거리를 걸으며 핸드폰을 바라본다. 그리고 살아있지 않은 인물이 움직이는 묘사를 읽는다.
언제까지고 사랑해나갈 소설을,
유중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