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tence Addiction






 얼굴 없는 얼굴에게 영혼 없는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며 밤 없는 밤을 건너듯 마음 없는 마음을 복기한다 사랑을 위한 사랑은 하지 않기로 시를 위한 시는 쓰지 않기로 사선에서 시작해서 사선으로 끝날 때 연약함을 드러낸 얼굴을 만난 적이 언제였나 결국 거울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방을 지나 안개 자욱한 거리로 나선에서 시작해서 나선으로 끝날 때 쉼 없는 쉼을 갈구하며 구원 없는 구원에 관한 장면을 떠올린다 사라지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것을 보듯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을 보듯이 사라지는 것을 내내 되살리기 위해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 너에게서 얼굴을 지워버렸다 얼굴 없는 얼굴 아래 이름 없는 이름을 새겨 넣고 기억 없는 기억의 온기 속으로 구름 없는 구름의 물기 속으로 입자와 파동의 형태로 번져나가는 관악기의 통로를 여행하듯 걸어간다 걸어간다 그저 지나치듯이 지나치듯이


― 이제니 作, <구름 없는 구름 속으로>



 

 소년에게는 몹시 아끼는 글이 있다. 책의 두께를 헤아려본 적은 없었지만 글자의 수와 자신이 소중하게 그은 손가락의 면적은 기억하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다소 유치한 제목의 소설은 이미 3년이 넘도록 인터넷에서 연재 중이다. 소년은 매일 수업이 끝나면 피시방으로 달려가 남들이 게임 캐릭터를 향해 총을 쏘는 소리나 가상의 차를 운전하는 소리 따위를 들으며 한 자 한 자 아껴 읽었다. 언젠가부터 이 소설의 조회수는 늘 1 뿐이었다. 혹여 작가님이 실망해 그만두기라도 할까, 불안에 휩싸인 이 소설의 유일한 독자는 피시방 한 시간 600원이라는 금액이 제게 얼마나 귀중한지 알면서도 매일 소비했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온 후로는 다행히 상황이 바뀌었다.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나왔고, 미성년자인 그의 보호자를 자청하는 친척들은 특별히 그의 핸드폰을 바꿔주었기 덕분에 더 이상 피시방에 가질 않아도 괜찮았다. 이제 소년은 길을 걸으면서 소설을 읽는다.


 그는 이 긴 제목의 소설을 줄여서 ‘멸살법’이라고 지칭했다. 기실 무엇이든지 줄여 부르는 방법이야 각자의 재량이라지만, 소년에게 이는 조금 특별한 느낌이었다. 누구도 보지 않는 가장 소중한 것에 붙여준 애칭이다. 자신만이 부르는 애칭은 책상 서랍 가장 깊숙이 꽁꽁 숨겨둔 보물상자와도 같았다.


 종종 소년은 자문하곤 했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 소설을 사랑하는 걸까.


 표지(表紙)조차 없는 이 소설은 어떻게 내 삶의 표지(標識)가 되어주는 걸까. 솔직히 멸살법이 재미있냐고 묻는다면, 흠. 자신 있게 “그렇다.”라 대답할 수 없다. 편당 분량은 몹시 길지만 묘사와 설정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장황하여 가독성이 떨어진다. 전개는 참신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사이다’가 드물다. 매 번 주인공은 역경에 부딪친다. 수십 번, 아니, 오늘 올라온 편까지 더하면 223번이 훌쩍 넘는다. 주인공은 인간의 기준으로는 먼치킨이지만 우주에서는 고작 티끌이다. 언제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죽음을 맞이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 주제에 때로는 멍청한 결정을 내리곤 때론 외벽이 오기도 전 스스로 걸음을 무너뜨린다.


 그럼에도 이 독자는 결국 성경처럼 글을 읽는다. 글의 주인공을 본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유중혁이다. 소년과는 달리 이름도 멋지고, 본 적 없는 얼굴도 굉장히 잘생겼다. 그는 이미 수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이 실패는 한 번의 성공을 위한 실패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주저앉지만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선다. 먹먹한 벽도 언젠가는 뛰어넘는다.


 소년은 그것에 매료되었다.


 유중혁이 가지게 된 최초의 신념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는 달리 부딪친다. 자신의 밖에 있는 수많은 시선들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기어코 그 시선들마저 매서운 칼날로 잘라내려 든다. 자신은 하지 못한 것들을 그는 해낸다. 멸살법의 세계는 결코 희박한 빛 한 줄기 내려준 적이 없지만 유중혁은 스스로 빛이 된다.


 사람인 적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독자는 몇 번이고 늘어놓았다.


 그것이 못내 부럽고 뿌듯해서. 자신이 유중혁이었으면 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쉼을 멸망하는 세계로부터 찾아 말했다. 픽션의 이야기였다. 단칸방 안에 갇힌, 그에게는 언제나 잔인했던 어미를 보러갈 적에도 늘 거짓된 이야기를 했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돌아가는 길에도 활자를 읽었다. 유중혁이 왜 웃는지 알아보고 이 다음에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유추했다. 실재하지 않는 세계라도 괜찮았다. 구름보다 먼 공중이라도 좋다.


 그 거짓이 소년의 전부였다.


 유중혁은 내가 값을 지불해서 소중히 품에 끌어안고 소유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전자의 배열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영영 가지지 못할 당신이, 실제로는 바라보지도 못할 거뭇할 등을 곧게 핀 채 걸어가 주었으면 했다. 만인에게 축복받길 원한다. 무기를 버리고 웃기를, 소원을 이루기를.



 독자는 늘 유중혁이 행복해지는 상상을 한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전부 가진 그 -사람인 적 없는- 사람이, 이번에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져주길 바란다. 


 그의 곁에 있는 다정한 사람으로부터 구원 받길 원한다. 나는 오직 하나, 사랑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는 행위밖에 해주지 못하지만. 자신이 매일 읽는 글의 마지막 편에는 그가 모든 긴장을 풀고 멸망 아닌 탄생을 끌어안고 모든 시선으로부터 해방되어 잠들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리하여 소년은 먼지 낀 거리를 걸으며 핸드폰을 바라본다. 그리고 살아있지 않은 인물이 움직이는 묘사를 읽는다.


 언제까지고 사랑해나갈 소설을,


 유중혁을.












 겨울이 되기도 전에 감기부터 걸렸다. 이번엔 꼭 독감 주사를 맞아야겠다며 결심한 지 겨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겨우 10월을 반 지났을 뿐인데 금년은 예년보다 날씨가 빨리 추워진 탓이었다. 수도권은 말할 것도 없이 온도가 뚝 떨어져 여기저기 대중교통은 콜록대는 사람들 천지였다. 그 중 한 명에 옮은 건지 아니면 재수가 없었던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대박 난 신작의 새로운 패치 때문에 정신이 없는 사람들 뿐이었고 이리저리 바쁜 만큼 직장동료들은 건강이 아슬아슬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찌감치 마스크를 쓰긴 했지만, 재수가 없으면 여기저기 병원균을 퍼트리고 다니는 숙주가 될지도 모른다.


 내일은 반차를 쓰고 병원에 가야지. 콜록 얕게 기침한 나는 손등으로 이마의 열을 가늠했다. 체온계가 필요하다. 내 책상에는 가습기가 없는 탓에 목이 영 칼칼했다. 차가운 물을 마시면 더 상태가 안 좋아질 테니 받아 마실 수 있는 건 따뜻한 물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탕비실에 들어와서야 잠시 마스크를 내릴 수 있었다. 텀블러에 차가운 물을 약간 받고 뜨거운 물을 끝까지 받아선 평소엔 쳐다보지도 않던 둥굴레 차의 티백을 물에 담갔다.


 탕비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던 유상아가 마스크를 본건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넸다.


 “독자 씨, 약은 드셨어요?”

 “아, 편의점에서 타이레놀 사 먹었습니다. 상아 씨도 조심하세요. 저한테 옮을지도 몰라요.”

 “타이레놀로 괜찮으시겠어요? 상비약 중에 아마 감기약도 있을 거예요. 전 잔병치레가 적은 편이라 웬만해선 잘 안 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유상아는 빙긋 웃고는 제 텀블러를 씻었다. 나는 감사합니다. 하곤 탕비실을 벗어나며 다시 마스크를 꼈다. 시간이 날 때 확인해 봐야겠다. 지금은 QA 부서도 박이 터지고 있으니까. 퇴근하고 싶다.


 물론 그 꿈은 허사가 되었다. 나는 말단인 만큼 눈치를 보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고 그건 돈도 되지 못하는 야근에 추가 근무였단 의미였다. 그래도 퇴근을 한다고 기분이 좋았다. 집에 가서 얌전하게 소설이나 읽다가 얼른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이 남자를 만나기 전만 해도 말이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신세라고는 하지만 나는 꽤 평화로운 퇴근길이었다. 이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수십 또는 수백 번은 다녔을 길목이니 딱히 앞을 살피지 않고도 길을 걷는 게 쉬웠고, 손목을 낚아채기 전까지만 해도 핸드폰으로 오늘의 신작을 여럿 훑으며 머릿속으론 악평하고 있었다.


 처음엔 사람을 잘못 봤나 싶어 누구세요? 하곤 떨떠름하게 말했지만 남자는 대답도 없이 나의 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쉽게 표현하자면 사이비 종교를 구도하는 사람들과도 비슷한 눈빛이었다. 그 시점에서 나는 일신상의 위협을 느꼈다. 정말로 겁이 났다. 남자는 버클이 잔뜩 달린 이상한 코트에 줘도 입지 않을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힐끗 바라본 부츠도 코트와 같은 버클이 잔뜩 달려 있었다. 상태가 이상한 사람을 괜히 건드렸다가 봉변을 당할까 봐 그가 잡은 팔목을 쳐내고 달아나려 했더니 어떻게 눈치챈 건지 급기야 남자는 내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김독자.”


 남자는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일부러 그의 말을 무시했다. 내 이름은 김독자가 아니며 나의 주변인 중에도 김독자가 없다는 그런 무해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고 있자 남자는 기묘한 얼굴을 했다. 설마 원한 관계인가? 그렇다고 하기에 내 인생에서 이런 얼굴을 봤다면 잊었을 리가 없었다. 남자는 매우 화려한 얼굴이었다. 매우 하고 표현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너무 진부한 표현이지만 인간의 미모가 아닌 것만 같은 얼굴을 해서는 겨우 한다는 짓이 이런 짓이라니. 일 이 분도 아니고 오 분을 넘어선 시간을 붙들려있자 한숨이 나왔다. 남자가 어렵사리 입을 떼, 겨우 하는 말이 밥은 먹었나? 였다.


 "아뇨. 붙잡고 계셔서 아직 저녁은."

 "그렇군."


 그러니 이제 놓아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입을 비집고 나오려 드는 말을 억지로 억누르곤 심호흡을 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큰 노력이 필요했다. 퇴근길의 직장인이란 원래 그런 존재다. 예민하고 예민한 인내심이라는 게 극소량 함유된 것. 말 싹수를 보아하니 여간 보통내기가 아닌 모양인데 언제까지 상대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새로운 진상 유형이라 알고리즘이 어렵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결국 나는 허기에 지고 말았다. 기침을 연신 한 나는 결국 그에게 입을 열었다.


 “붕어빵 드시겠습니까?”


 물론 권유의 형태를 빌렸을 뿐 나의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남자도 짐작한 건지 이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노점에서 붕어빵을 사는 동안 남자는 우두커니 서서는 나를 바라봤다. 손목을 놓았지만 도망간다고 한들 금방 잡힐 것만 같은 직감에 굳이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매크로 답변처럼 감사와 수고를 비는 말을 전한 나는 붕어빵이 든 봉투를 들곤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날씨가 추운 만큼 나무 의자는 엉덩이에 차가운 느낌만을 전했다. 남자는 나를 따라와선 앉지 않고 우두커니 섰다.


 “드세요. 슈크림이랑 팥 둘 다 천 원 치 샀으니 원하는 쪽으로 드시면 됩니다.”

 “아무거나 상관없다.”


 나는 손을 집어넣어 집히는 대로 붕어빵을 내밀었다. 남자는 붕어빵을 쥐곤 한참을 바라봤다. 남자는 붕어빵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2천 원 치의 붕어빵 중에 5개를 먹을 동안 남자는 하나를 겨우 못 먹고 깨작이고 있었다. 내 호의가 썩 좋지 못한 취급을 받자 기분이 상했다. 다 먹은 쓰레기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뒤 손을 주머니에 넣곤 남자에게 입을 열었다.


 “누구신데 저한테 이러십니까? 전 김독자라는 사람은 아닐뿐더러….”

 “헛소리를 하는군. 나는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 미노 소프트에 다니고 있다는 것도 말이야.”

 “……. 그럼, 용건이 뭡니까?”


 말이 날카로워질 수 밖엔 없었다. 해가 떨어지며 기온도 점점 떨어져 감기에 걸린 몸은 고통을 호소했다.


 “나는… 유중혁이다.”


 남자가 아니 유중혁이 힘없이 뱉은 말은 대사에 가까웠다.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하는 듯한 얼굴에 혹 나의 동창 중에 저런 사람이 있었던가. 머리를 굴렸다. 나는 남자의 말을 반복했다. 유중혁, 유중혁.


 “유중혁 씨. 제가 아는 분 중엔 그런 성함이 없습니다. 혹 게임 문제로 문의가 있으시면 따로 고객센터로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유중혁의 표정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러면서도 그 눈에는 희열이 흘러넘쳤다. 목덜미가 서늘한 게 썩 기미가 좋지 않았다.


 “그래. 너는 정말 나를 모르나 보군.”


 유중혁이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아마 유중혁이 찾아 헤매던 김독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다음에 보자.”



*



 어제저녁 찬바람을 맞은 탓인지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얼굴에서도 드러났던 모양인지 부서의 상사가 반차를 쓰고 병원을 가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하긴 어차피 계약직 직원 하나 빠진다고 크게 다를 게 없긴 하니 하는 말일테다. 괜히 다른 직원에게 옮기지 말고 얼른 나으란 뜻일 수도 있고. 기분이 땅굴을 팠다.


 일부러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왔다. 직장의 근처에도 병원은 여럿 있었으나 괜히 유중혁을 만날까 겁이 낫기 때문이다. 동네의 가정의학과 의원에서는 직장인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조언을 했다. 푹 쉬고 잘 드세요.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노력해 볼게요.


 처방받은 커다란 링거를 한참 맞으며 단잠을 잔 뒤 깨자 몸은 퍽 개운해졌다. 사람들이 괜히 링거 타령을 하는 건 아니구나. 벨을 누르자 링거를 확인하러 온 간호사가 이내 링거를 잠가 알코올 솜을 대며 바늘을 뽑았다. 나는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그 피가 멎을 때까지 솜을 꾹 누르며 눈을 껌뻑였다.


 “유중혁….”


 나는 기세와는 달리 홀연히 사라진 유중혁이 언제 나타날까 전전긍긍이었다. 언제라도 회사 앞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칼이라도 찌르면 자신의 목숨은 끝장이었다.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 이내 피는 멎었다. 몸을 일으킨 나는 계산을 하며 처방전을 받았다.


 약국에서 받은 3일 치의 약은 알약의 개수가 얼핏 봐도 많았다. 저걸 삼키는 것도 고역일 거다. 그래도 잠이 오는 약은 빼달라고 했으니 크게 졸리진 않을 것이다.


 “저녁은 약이 한 알 더 들어가 있습니다. 하루에 세 번 식후 30분에 드시면 됩니다. 시럽은 기침이 심할 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약국의 이름이 커다랗게 적힌 봉투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핸드폰을 쥐었다. 소화가 잘되는 음식이 좋을 테니 죽이라도 끓이는 게 좋겠다. 전에 사다둔 야채죽 분말이 찬장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김독자.”


 진중한 목소리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루를 못 넘기고 결국 마주치게 된다니 나도 재수가 옴팡지게 없는 놈이구나. 유중혁은 어제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기묘한 코트도 부츠도 없이 평범한 맨투맨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 외모가 준수한 만큼 연예인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 했다. 유중혁은 아마 자신의 집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유중혁 씨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오늘이 마지막 경고입니다. 한 번만 더 찾아오시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그건 위험하군.”

 “위험한 걸 아는 사람이 이런 짓을 합니까?”

 “나는 네게 갚을 게 있어. 적어도 한 번의 기회를 줘.”

 “기회는 어제의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아니 그런 기회가 아니다.”

 “그럼 뭘 바라시는 겁니까? 말해보세요.”

 “나와 연애를 하자.”


 툭 손에서 핸드폰과 비닐봉지가 떨어졌다.


 “너를 사랑하고 싶다.”












 나는 한없이 위태로웠다. 풍랑 앞의 나룻배보다 비루먹은 것이 지금의 나였다. 하필 너를 만나서, 겨우 너를 만나서, 사랑해서.


 사내는 몸을 웅크린 채 꿈틀거렸다. 비애에 잠겨 뒤로도 앞으로도 굳지 못하고 정처없이 흔들렸다. 단단한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그저 눈 뜨는 것이 두려웠다. 망막에 상이 맺히는 것이 그토록 끔찍하다는 사실을 너를 잃고서야 깨친 나를 죽이고 싶었다. 전부, 전부, 전부. 


 김독자, 네놈의 오만한 사랑이 나를 죽인다. 그 무른 듯한 손가락으로 옭아맨 내 목을 제대로 베어물지도 않고 사라진 네놈의 잔영은 오롯이 두개頭蓋 속에만 남아 꺼내볼 수조차 없었다. 그저 죽은 듯이 잠들 적에만 이 형태 없는 고통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네놈의 계산일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멍청한 네놈이 내 감정까지 적확하게 꿰뚫었으리라 생각조차 않지만. 


 네놈으로 망가진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 차마 일행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떠돌아도 떠돌아도 네놈이 오질 않아서, 이번 생에 최초로 버림받은 기분을 만끽했다. 생각보다 역겹더군.


 세 번의 삶 중 가장 강렬했다. 하루가 지나면 새롭게 덧칠되는 쓴물을 삼키면서 고개를 처박았다. 머리를 굴릴 때라고는 네놈에게 닿지도 않는 편지를 써내릴 때 뿐이어서.


 “……….”


 유중혁은 꺼멓게 우글우글 일그러지는 생각들을 밀어내듯 눈을 질끈 감고 전해진 적 없는 밀어를 앞에 둔 채 짧게 떨었다.


 김독자, 김독자, 김독자, 김독자, 망할, 김독자. 제발, 제발…….


 그는 다시 없을 살심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고작 석 자의 이름이 주는 달콤함에 헤어나지 못했다. 아지랑이처럼 실체 없는 그것을 좇아 게걸스럽게 혀를 놀렸다. 기어코 다시 밀어를 써내려간다. 스타 스트림에 구원의 마왕이 없다는 말은 이제 닳고 닳아 읽히지도 않았다. 차라리 완전히 사라졌다는 확신이라도 든다면 죽어서라도 끊었을 것을, 꼭 그놈의 체온처럼 미지근하고 부드러운 뒷맛이 뿌리까지 눅진하게 들러붙어 옴짝달싹 할 수 없도록 했다. 한없이 무력한 지금 이 순간에도 너를 죽이고 싶었다. 회귀가 아니라 되감고 싶다. 대교에서 내게 강짜를 부리던 미친 놈의 표정을 보지 않고 목을 부러뜨렸어야 했다. 호기롭게 빛나던 네 눈을 마주하지 말고 던졌어야 했어. 


 지긋지긋한 회귀만 아니었더라도 사내는 제 머리통을 터뜨려 일찌감치 놓여날 생각도 놓치지 않고 검토했을 것이다. 이 순간에야 김독자를 사랑함을 깨달은 스스로가 밉고 미워서. 


 물론 그저 무익한 화풀이로 생을 끊기에는 이 세 번째 삶이야말로 김독자의 흔적을 품은 거대한 공동이라 불가했다. 


 유중혁은 반투명한 채팅창 뒤로 어스름하게 스치우는 새의 그림자에 숨을 잊고 이를 악물었다. 그 날 이후 남자는 하늘을 보는 법을 잊었다. 떠오를 때마다 꾸역꾸역 삼켜 감추었다. 곧게 뻗쳤던 날개와 그것이 없는 하늘이야말로 가장 큰 악몽이라서 버틸 결심이 번번이 흔들렸던 까닭이다.


 그는 한참을 망연하게 서서 격랑을 견디고 다시 손을 놀렸다.


 [김독자.]


 딱 석 자를 적기 위해서. 그 이상의 언어를 갖지 못한 감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