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습한 여름 공기 사이로 매미 울음소리가 귓가에 도달했다. 정확히 3번째 맞이하는 아침이었다. 담담함을 가장한 시선이 맞은편 벽의 시간을 더듬었다. 이제는 익숙한 아침 7시. 시선이 닿는 찰나, 정각을 지난 초침은 정확한 시간을 호소했다. 유중혁은 단 하루. 그날의 아침햇살이 따가워 이 시간에 알람보다 일찍 기상했다. 그러나 하루의 반복이 시작되자 아무런 반동 요소 없이 당연하다는듯이 눈이 떠졌다. 마치 이 시간에 일어나야만 한다는 듯 거부감 없이 천장을 마주했다. 하루가 반복되기 시작한 이레로 생긴 버릇아닌 버릇이었다. 유중혁은 이것을 잠시 당황하곤 끝내 받아들였다. 어차피 하루의 반복부터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여름의 얇은 이불은 일으키는 몸을 따라 아래로 밀려났고, 차가운 방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하루의 반복은 이미 알고 있던 탓에 늘 지루했다. 단 두 번만에 익혀진 패턴은 어렵지 않게 미래아닌 미래를 예측했다. 지루하고 습한 여름의 일상. 그럼에도 유중혁은 긴장을 놓지 못했다. 아니, 놓지 않았다.
방에 딸린 작은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씻은 유중혁은 작은 잠꼬대가 들리는 여동생의 방을 지나쳐 썰렁한 주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몸짓으로 흰 그릇 하나를 꺼내들어 제 몫의 시리얼을 부어냈다. 냉장고 옆, 작은 수납 공간에 다시 되돌려 놓은 후 냉장고를 열어 아직 트지 않은 우유 한 팩을 꺼내들었다. 몸을 돌려 차가운 수저 하나를 들고 식탁으로 되돌아와 우유를 붓는 순간, 당연하게도 작은 메시지 창 하나가 떴다.
[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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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시나리오 # 01 ─ 멸망하는 세계에서 구원하라>
분류 : 서브(개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곧 세계의 멸망이 도래합니다. 당신은 그 속에서 단 3일동안 당신의 사람들을 지켜내십시오.
제한시간 : 30일
보상 : ???
실패 시 :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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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정체불명의 메시지 창을 받았을 땐 무리하게 게임을 한 나머지 잠이 덜 깬 지금도 헛것이 보이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메시지 창을 가늠하듯 살폈지만 불투명한 스크린 창이 무언가를 뱉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시선을 떼며 숟가락을 그릇의 주변으로 깊게 욱여넣었다.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게임을 남들보다 잘할 줄 아는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찾아온 비극은 끔찍한 상처가 되어 곪았다. 첫날, 안일하게 생각한 나머지 끔찍한 광경을 엿봤다. 차츰 모노톤으로 흐려지는 하늘과,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휘몰아치는 먹구름이 시야를 장악했다. 알 수 없는 묘한 소음이 울리자 교실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 비 소식도 없이 아침부터 줄곧 화창하더니, 손바닥 뒤짚듯 바꿔버린 모습에 남 모를 비극을 암시하듯 불안하게 일렁였다. 비로소 유중혁은 자신에게 닥칠 미래가 덧그려지는 듯 했다.
제 앞에 드리워진 사실을 믿기 어려워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쿠르릉 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찢어지듯 열렸다. 그 구멍이 늘어 수십개가 되자 교실 안은 웅성이는 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세상으로 쏟아지던 무언가. 창문에 붙어 밖을 보던 아이들의 얼굴은 제각각이었다. 얼굴이 희게 질린 아이부터 무슨 이벤트냐며 태평하게 주변 친구들에게 묻는 아이까지. 그러나 유중혁은 알았다. 이것은 오늘 아침 받았던 멸망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뒤늦게 밖으로 뛰쳐나갔으나 밖은 이미 아비규환이 되어있었다. ‘당신의 사람’. 자신의 사람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이를 생각 해볼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임에서 툭 튀어나온 듯 괴상한 모양새를 한 괴수들이 서울 한복판을 뒤집으며 날뛰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피비린내가 후각을 자극했고, 발에 채이는 부스럼들이 느껴졌다. 그러나 비린내에 대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전신을 저릿하게 만들 멸망에 대한 공포감 역시 적었다. 유중혁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것들을 익숙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이상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죽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거대하고 흉측한 괴물의 힘은 연약한 고등학생의 몸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마주친 세로 동공. 삽시간에 흥분한 괴물이 달려들었고, 조금 강해진 공포감에 몸을 뒤로 무르는 동시에 코앞으로 괴물의 앞발이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그는 눈을 떴다.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라고 하던가. 얼떨떨 했다. 다시 맞이한 같은 날의 아침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려 몸을 찬찬히 어루만졌다. 살아있다. 아무런 이상증세 하나 없이. 그와 동시에 시선은 시계로 갔고, 기다렸다는 듯이 초침은 정각을 지나쳐갔다.
그러기를 벌써 세 번째다. 그럼에도 아직 자신의 사람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이를 추리지 못했다. 가장 먼저 생각 난 것은 여동생이었지만, 그 후로는 아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중혁은 찝찝했다. 복수 형태의 단어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이 굴었다.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유중혁은 그릇을 설거지 통에 가지런히 두었다. 슬슬 학교로 향할 시간이었다.
지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은 꿈과 같았다. 오히려 멸망하던 세계가 더 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렴. 두 번째 땐 이주 동안 생존해 있었으니. 오히려 차분한 지금이 더 멀게 느껴졌다. 벌써 익숙해진 탓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신발에 발을 욱여넣었다. 딱 맞게 감싸는 신발의 감촉이 아무렇지 않았다. 유중혁의 시선이 여동생의 방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지금은 정해진 일과를 모두 마쳐야만 했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면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출근이나 등교를 위해 나온 사람들로 길가가 복잡했다. 간간히 곁을 스쳐지나가는 자동차들과 가게 문을 열기 시작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슬슬 자신의 사람에 들어갈만한 사람들을 추려야 했다. 계속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죽을 수는 없었다. 수틀린다면 죽음을 기점으로 다시 시작하겠지만, 그러기엔 얻은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조금 더 오래 살아야했다. 이주의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여전히 촉박했고, 부족하게 느껴졌다. 첫날과는 다르게 얼굴에 머무는 표정은 진지했다.
자꾸만 길거리로 그날의 재앙이 겹쳐보였다. 저 건물 사이로 꼬리를 흔들던 괴수의 몸짓에 아스팔트 도로는 아이들 장난감처럼 푹푹 파였고, 저 건너 건물은 기어코 무너져 사람들의 비명이 그득하게 만들었다. 이 발치 쯤에선 처음보는 사람이 울컥 피를 토하며 간신히 눈을 깜빡였고, 이 골목을 지나면……
발걸음이 멈췄다. 누군가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하루가 두 번 반복 될 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이 나타났음에 놀랐다. 처음보는 남자는 발걸음을 멈춘 유중혁을 바라봤다. 작은 의문을 표정에 드러낸 채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자신이 골목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통해 유추해낸 사실을 토대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죄송합니다. 하는 목소리는 어디서 한 번 들었던 것처럼 흔해 빠진 목소리였다. 여전히 제게 시선이 있음을 인지한 남자가 눈을 굴리다가 머슥하게 웃으며 천천히 뒤로 걸음을 옮겼다. 몸을 서서히 돌리고, 완전히 외면하기 전 눈인사를 하며 앞을 향해 걸었다.
일말의 과정을 아무렇지 않게 끝마친 남자에 비해 유중혁은 혼란스러웠다. 고작 3일뿐이었지만 단 한 번도 저런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으나, 그날과 똑같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이 골목에서 빠져나올 사람은 없었다. 없어야했다. 문득 눈가로 불안감이 스쳐지나갔다. 3일반에 변수가 나타났다. 선명한 예민함이 안면 전체로 퍼져나갔다. 주먹을 꾹 쥐었다가 놓았다. 오늘은 다른 오늘과는 다르게 더 신경 쓰고, 행동을 빨리 해야했다. 손을 들어 마른 세수를 한 유중혁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마다 매미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붙었다.
*
교실에 도착한 유중혁은 기가 찬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오늘 부딪힐 뻔한 남자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우연인가. 동그랗고 까만 뒤통수가 눈에 익었다. 무던히도 평범한 뒤통수지만 유중혁은 단번에 알아챘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을 알아채지 못한 듯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조금 몸을 움직여 살펴보니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그런 평범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상황이 처음인 유중혁은 더더욱 날을 세울 뿐이었다.
아침조회 시간에도,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그 어떠한 행동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남자의 뒤통수로 시선이 집요하게 늘러붙었다. 수업은 어차피 중요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뭐하느냐고 혼내는 선생도 있었으나, 유중혁은 게의치 않아했다. 오히려 선생의 호통에 살짝 뒤돌아본 그 남자와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놀란 표정이 느리게 번지다가 어색하게 몸을 앞으로 틀었지만 그 기점으로 신경이 쓰이는 듯 가끔씪 뒤를 돌아보는 시선이 보였다. 선생은 혀를 차며 포기했고, 그 남자에게는 묘한 찝찝함을 심겨줬다. 이젠 아예 팔짱을 껴 그를 지켜봤다.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유중혁을 의식하기 시작한 남자는 쉬는 시간 마다 뻣뻣한 몸짓으로 의자에 앉아있거나, 몸을 움직여 교실 밖으로 벗어났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가 가는 곳은 교실과 가까이에 위치해 창문 너머로도 보이는 화장실 뿐이었다. 그에게 다가가는 아이들은 없었고, 그의 짝궁도 그를 못 본 척 했다. 사람들 속에 던져두면 곧 잃어버릴 정도로 특징 없고 평범한 남자이나, 그래서 더더욱 홀로 이곳에 떨어진 사람 같았다.
오히려 특징 없이 흐릿해서 의심이 갔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 마주했던 그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거나 에어컨 바람이 그에게 갈 때면 간간히 흔들리던 검은 머리카락이며, 종종 자신을 확인하려는 듯 살짝 몸을 틀면 보이는 명도 낮은 검은 눈. 이따금 핸드폰을 가볍게 터치하는 손가락은 얇았고, 밖과는 다르게 낮은 온도 때문인지 창백한 뺨이 눈에 띄었다. 그 외엔 특별히 튀는 것도, 뛰어난 것도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지루한 수업에는 간간히 졸기도 했고, 심지어 수업시간 도중 선생님 몰래 핸드폰을 슬쩍 바라보기도 했다. 꽤 대담한 행동에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이 모든 것은 반나절 동안 빠짐없이 그를 관찰한 결과였다.
4교시의 마지막을 알리는 수업종이 경쾌하게 울렸다. 종이 치면 바로 뛰쳐나갈 생각으로 반쯤 일어나있던 아이들이 쏜살같이 교실을 뛰쳐나갔다. 오늘 맛있는 거 나온다며? 무슨 일이래 갑자기? 맛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오늘 급식 이름만 봐선 대박이야. 뒷자리를 스쳐지나가는 아이들의 평범한 대화가 뭉그적하게 다가온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이런 평범한 대화도 사라질 것이 뻔했다. 묘하게 낯빛이 가라앉았다. 곧 들이닥칠 미래에 살풋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기……”
그와 동시에 제게 말을 거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남자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교실 자체에 아무도 없었다. 벌써 다 나갔는지 빈 교실은 휑했다. 남은 것은 아이들이 책상 위를 잔뜩 어지른 문제집이나 필기도구 따위의 것들 뿐이었다. 조금 후면 하등 쓸모도 없어질 것들. 태어나 여지껏 펜만 잡아봤을 아이들이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훑어보던 유중혁의 시선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그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뭐지?”
“아, 혹시 오늘 아침에……”
“아침?”
“응, 아침에 골목길에서. 혹시 부딪힌 적 있었나?”
남자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옷깃도 스친적이 없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긴 했으나, 두어 발자국의 간극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적 없다. 하고 고개를 돌렸음에도 남자는 여전히 같은 곳에 존재했다. 혹시 그거 때문에 기분 상했나 해서, 물어봤어. 하는 목소리는 조금 힘이 없다. 고작 부딪힌 것 가지고 기분이 상할 리가. 삐죽해진 표정으로 남자를 다시 돌아보자 눈을 데굴 굴린다. 내가 그렇게 속이 좁아보이나? 건네는 물음에 어색하게 하하 웃는 건 덤이었다.
“아침부터 계속 미간에 힘주고 쳐다보길래.”
“…….”
튀어나온 말은 사실이라 뭐라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물어봤어. 이제야 우물쭈물 거리던 표정이 싹 사라졌다. 개운해졌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는 이곳을 떠나지 않고 앞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아 바라봤다. 너는 밥 안 먹어? 오늘 급식 맛있다던데, 애들이. 그러고보니 너, 수업 시간에 집중 잘 안하더라. 그래도 괜찮아? 너 선생님도 포기하셨잖아. 아, 너 게임 잘한다고 했었나? 애들이 말하는 거 들었거든.
이제껏 미간 찌푸린채 반나절 동안 바라본 사람에게 단 말 한마디로 풀어져선 조잘조잘 이야기를 꺼내는 남자가 퍽 웃겼다. 몸이 살짝씩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얇은 머리카락 하며, 요목조목 따져봐도 평범해 보이는 인상은 내면에 날카로움과 예민함을 은근하게 품고 있었다. 얼굴 아래로 들어난 흰 목선이라거나, 몸의 선을 보아하니 평범하게 앉아서 공부만 한 고등학생의 몸이라 앞으로 일어날 그 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도 없었다. 조잘조잘 이야기를 꺼내는 남자를 지그시 바라본다. 지독하게 평범한 남자는 자신이 툭 쳐도 부러질 것 같았다. 이런 그가 뭘 하겠는가. 유중혁은 잠깐 자신의 예민함을 내려놓기로 했다. 어차피 멸망이 시작되면 사라질 작은 목숨 하나일지도 몰랐다. 제 시선을 느끼기 시작한 남자는 이따금씩 어색하게 웃으며 익숙하게 중혁아? 하고 불렀다. 그런 남자의 행동이 싫지만은 않아 무심히 앉아 듣기만 했다. 곁에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있던 남자는 생각보다 이야기를 잘했다.
*
“나는 독자야. 김독자.”
그 남자의 말이 허공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때 즈음 제게 건넨 말이었다. 남자의 마지막 말이기도 했다. 시간을 확인한 남자는 뭐라도 사 먹어, 라는 말과 함께 교실을 나섰다. 처음 다가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없이 멀어졌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어디를 간다는 말도 없이 조용히 나갔다가 5교시가 시작할 때 즈음 홀연히 나타나 자신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흰 화면을 뭘 그리 열심히 보는지, 유중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까의 남자가 그랬듯이 이번에는 유중혁이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4시를 향해 서서히 달리는 중이었다. 이제부터 그는 해야할 일이 있었다. 여름방학을 얼마 남기지 않았기에 영화를 보는 아이들 사이로 슬그머니 일어나 뒷문을 향해 다가갔다. 어두운 교실임에도 제 행동에 선생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잠깐 화장실 좀.”
“그래, 화장실만 다녀와야 한다. 어디 딴 길로 새면……알지?”
장난스레 건넨 말에 유중혁은 대답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에 남자와 눈이 마주쳤던 것 같기도 했다. 예민함을 품은 눈꼬리는 아까보다 더 뾰족했던 것 같기도 했다.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 다시 바라봤지만, 또 휴대폰을 보는 듯 고개가 살짝 숙여져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제게 보이는 뒤통수를 응망하다가 교실을 나서려고 했다.
“선생님, 얘 코피나요!”
이제껏 남자를 보지 못했다는 듯이 행동하던 남자의 짝꿍이 돌연 소리 쳤다. 고개가 돌아갔다. 한 손으로 코를 틀어막은 듯 팔 하나가 올라가 있었다. 선생이 건넨 돌돌 말린 휴지로 코를 막았으나 양이 상당했는지 뒤에서도 그 핏자국이 훤했다. 짝꿍이 좀 양호실까지 데려다 줘라. 그렇게 말하는 선생의 말에 짝꿍이 엉거주춤 남자를 부축하며 일어섰다. 영화가 재생되느라 드리워진 빛에 남자의 뺨은 더욱 창백하게 보였다. 그러나 표정은 잔잔했다. 익숙하다는 듯이, 혹은 예상했다는 듯이. 가만히 서있는 유중혁을 지나치며 한 번 더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차분한 시선이 감돌았다가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것들은 잠재웠던 묘한 찝찝함이 되살아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복도 끝으로 둘은 점점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 좀 닫아달라는 누군가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교실밖으로 향했다.
시원하다못해 춥기까지 하던 교실의 공기와는 확연하게 다른 바깥의 습기가 훅 다가왔다. 건너편에 서있는 투명한 창문 너머로는 새파란 여름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가만히 서서 그 하늘을 바라보다가 교실 문을 소리없이 닫았다. 다시는 느낄 수 없을 이 일상을 곱씹듯 흘러가는 흰 구름을 조금 더 응시하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제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 조차 아까웠다. 유중혁은 해야할 일이 있었다.
*
두 번째로 아침을 맞이한 날. 어려이 그 자리에서 도망치다가 구르듯 들어간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의 3층. 사무실로 보이는 곳에서 묘한 힘이 느껴지기에 다가갔다가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범상치 않은 검이었다. 홀린 듯 손잡이 부분을 쥐었을 땐, 원래 자신의 것이라는 듯 착 감기는 감촉이 좋아 아직도 기억했다. 쥐는 순간 뇌 한 구석을 스치고 지나간 단 하나의 이름. 진천패도. 이런 게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답지않게 하며, 빠르게 그 건물을 향해 걸었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높은 건물. 기억을 더듬으며 고층 건물사이를 전진했다. 거리를 걷는 사람이 적었지만, 이 시간에 교복을 입은 학생이 걸어다니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몰렸다. 그런 시선들을 의식하며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미노 소프트.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었다.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다가도 멈칫했다. 이시간이라면 한참 근무중일 시간이 아니던가? 계단 한복판에서 멈춘 유중혁은 고민 하는 듯 미간 사이로 얕은 주름이 패였다. 조용한 건물. 4시를 향해 치닫는 시간. 근무 시간이 걱정되었으나, 4시가 되기 전 진천패도를 다시 얻고 수월하게 시작하고자 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고민은 끝났다. 잠시 내부를 들여다보다가 4시가 되자 마자 들어가 진천패도를 사수하는 것. 그런 다짐을 하며 계단을 마저 올랐다.
그러나 아까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회사는 거짓말처럼 텅 비어있었다. 사람 한 명 없어 지독하게 고요했다. 사장실을 지나고, 기획부와 재무부를 지나쳤다. 존재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웃기겠지만 그 남자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홀로 이곳에 떨어진 것만 같은 느낌. 유중혁은 작게 실소하며 QA팀의 사무실을 지나쳤다. 그리고 동시에 그때의 그 느낌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돌아갔다. 텅 빈 사무실. 그땐 전부 흐트러져 있었으나, 지금은 일렬로 늘어진 사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중혁은 이끌리듯이 그 사이를 지났다. 한 자리의 의자에 진천패도가 비스듬하게 기울어 세워져 있었다. 그때와 같이 가볍게 쥐었다. 어쩐지 반갑다고 웅웅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진천패도를 가볍게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4시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면 딱 4시정도가 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쯤이었다.
“학생이 이 시간에 여기는 무슨일인가요?”
고개를 들자 한 여성이 문가에 서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와 마찬가지로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
처음 마주했을 때 본 표정은 웃음기 하나 없는 냉정한 얼굴이었으나, 허공에서 시선이 얽히자 표정이 무너져 묘한 낯이 되었다. 그 남자가 간간히 짓곤하던 표정이었다. 서로 마주보는 내내 지나다닌 대화는 없었다. 유중혁은 섣불리 말을 꺼냈다간 수습할 수 없을 것 같기에 신중했던 탓이고, 그 여자는 오묘한 낯을 띤 채 탐색하듯이 바라봤기에 입을 열지않았다. 어쩌면 먼저 입을 열어줬길 바랬을지도 몰랐다. 언뜻 곤란함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학생이 지금 여기에 올 이유가 있나요? 그 여자로 인한 대화의 시작이었다.
유중혁은 마땅한 말을 고르려고 머리를 굴렸다. 힐끔 시선을 내려 핸드폰을 바라보자 4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은근한 초조함이 온몸을 감쌌다. 그냥 이대로 달려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 남자와 비슷한 표정을 짓는 이 사람이 궁금해 탐색하듯 바라봤다. 살짝 팔짱을 낀 여자의 표정은 여전했다.
“……형이 두고 온 물건이 있다고 해서 잠깐.”
차분한 음색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내뱉는다. 그러나 눈빛으론 거짓이 아니라는 뜻을 강하게 내포해 던졌다.
“형이요? 동생에게 잔신부름을 시키다니. 못된 형이네요.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김독자.”
왜 이런 이름이 나왔는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말하고 스스로가 놀라는 꼴이라니. 유중혁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그러나 그는 놓치지 않았다. 김독자라는 이름에 조금 표정이 풀어지는 모습을. 김독자를 아나? 진천패도를 쥔 손아귀의 힘이 잠깐 억세졌다가 풀어진다. 시간이 얼마 없어서 초조함이 배가 되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떠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다. 이번엔 좀 더 오래 살아야 했다.
“그렇군요. ……그 눈빛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달리 변함은 없네요. 그래서 다행이지만.”
누구지? 자신을 알고 있다는 뉘양스의 말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린 것 같지만, 유중혁은 똑똑히 들었다. 벌써 두 명이었다. 삼일 내내 보지 못했던 사람이 짧은 시간 동안 두 명이나 나타났다. 이 칼을 목에 겨눌까? 이 여자가 내 사람에 속할 확률은? 민간인을 죽여도 괜찮은가? 진천패도의 손잡이를 느리게 만지작거렸다. 여기서 더 지체된다면 망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빠르고, 확실하고, 정확한 루트만이 안심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려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줬다. 웃는 낯을 하고 있지만 어쩐지 슬픔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어요. 가는 길은 알고 있나요?”
그 말에 유중혁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많지는 않지만 왕복한 경험이 있는 자였다. 때문에 별 대답 없이 사무실을 나와 밖으로 향했다. 계단을 즈려밟는 행동은 거침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게임에서의 변수는 기꺼웠지만, 그것이 현실이 된다면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중혁은 시간이 급해 무시하는 척 계속해서 걸었다.
해는 아직도 높은 자리에서 세상을 뜨겁게 굽어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로 권력을 자랑하듯 높이 솟은 빌딩들. 그 사이 한적한 인도를 걷는 유중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천천히 뒤따르는 그 여자. 묘한 그림이었다. 습한 더위에도 그늘이 없는 빠른 길을 택해 점점 땀이 솟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저 멀리 학교가 보였다. 걸음을 재촉했다. 집 혹은 학교.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이기에 이곳에 자신의 사람이 존재할지도 몰랐다. 첫 목표는 우선 학교를 지키는 것이었다. 숱한 고민 끝에 내린 무식하면서도 간단한 결과였다. 일차적으로 그들을 지킨다. 그런데도 만약 실패한다면? 그 뒤의 생각은 또 다른 하루의 내가 고민해볼 일이었다. 시선이 핸드폰 시계로 향했다.
오후 4시,
시선이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59라고 쓰여있던 숫자가 00으로 바뀌었다. 유중혁이 걸음을 멈췄다. 아직 학교에 도착하지 못했다. 네 번째 궤변이었다. 급히 하늘을 봤다. 여전히 하늘은 파랬다.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사람은 적었지만 모두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따금 더위를 호소하며 찡그리다가 근처의 건물 안으로 급히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선이 휙 돌아가 건물 사이사이를 확인했다. 그러나 괴수들은 없었다. 햇빛을 피해 좁은 공간으로 몸을 들이 민 어둠들이 켜켜히 쌓여있을 뿐이었다. 이곳이 자신의 영역이라는 듯이. 빌딩의 길죽한 직사각형 모양을 흉내내어 자신의 온몸을 욱여넣었다. 암흑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것들은 종종 보이곤 하던 길고양이 혹은 낡은 전봇대 뿐이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04:01
시간은 결국 지났다. 그럼에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꿈인가 싶지만, 손에 쥐어진 진천패도는 꿈이 아니라 일깨웠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뺨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유중혁은 뒤를 돌아 익숙한 행동으로 그 여자의 목을 향해 진천패도를 겨눴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가 사그라들었다. 현재에 바쁜 현대인들 다운 행동이었다.
“계속해서 날 아는 듯한 말투군.”
“그렇게 보였나요?”
“그 묘한 표정도 그렇고.”
“여전히 날카로우시네요.”
그리고 여자는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제 목 앞으로 들이밀어진 진천패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절 죽이면 곤란할 거예요. 강단있는 문장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확신하지? 믿어도 손해보는 건 없을걸요? 여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동료거든요. 유중혁은 그 여자 앞에서 처음으로 소리내 웃었다. 명백한 헛웃음이었다.
*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자신을 유상아라고 소개한 여자가 다른 곳을 응시하더니 시선을 돌렸다. 묘하게 신뢰감을 주는 눈빛이었다.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았지만, 유중혁은 그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알려주지 않았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게임을 잘하는 평범한 남고생의 이름을 특별한 이유 없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저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거든요. 음……조금 까칠하긴 한데 싸우지는 말아요.”
“그 사람도 내 동료인가?”
“동료라고 생각해 주실 건가요?”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답례로 웃음이 돌아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련 없이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한 여자고등학교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고개를 기울었다.
“네가 말한 그 까칠한 사람인가?”
“아뇨, 그 사람은 조금 나중에 만날 거예요. 지금은 가까이에 없어서요. 일단 태풍여고부터 들릴 거예요. 그곳에는”
여자가 말을 고르는 듯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을 꽤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말을 들은 유중혁은 기분이 묘했다. 그 사람도 자신을 아는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제 기분을 살피듯 조용히, 그러나 신중하게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 하나하나가 익숙했다. 동시에 유중혁은 그것이 은근히 반가웠다. 어쩐지 둥지를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스로도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의문이었다. 그 여자의 등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따라오지 않는 자신을 느꼈는지 돌아보는 행동이 눈에 띈다.
차분한 표정, 어깨를 살짝 넘는 기장의 브라운 헤어, 봤다면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미인형의 얼굴. 그러나 유중혁은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녀는 유중혁을 기억했다. 아이러니한 사실.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 혹은 무언가에 대한 궁금증을 호소하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여자를 바라본다. 태양을 등지고 있는 탓에 역광이 드리워져 표정이 보이진 않지만, 자신을 알고 있음을 선언한 후 유지했던 담담한 표정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제야 유중혁은 발걸음을 떼어냈다. 사람이 많다면 한결 더 수월해 질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동안 유중혁은 고민했다. 이 시나리오를,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세계의 종말에 대해 말해도 되는 걸까?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엔 아직은 섣부르다는 판단이 들었다.
“당신 곁에는 동료가 있어요.”
유중혁의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어느새 곁에서 걷는 그녀는 앞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변함 없어요.”
유중혁은 입을 꾹 다문 채 앞을 바라봤다. 저 멀리, 열기 사이로 태풍 여자 고등학교가 시야에 걸리기 시작했다.
*
“언니!”
한참을 걸었다. 푹푹 찌는 듯한 더위에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시끄럽게 우는 매미 소리는 여전했고,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엄청났다. 그럼에도 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걸로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목표한 곳으로 끊임없이 직진 할 뿐이었다. 고등학교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 사이엔 그 흔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내내 묵묵히 입을 다물고 걸었을 뿐이었다. 유중혁은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구태여 묻지 않았다. 어쩌면 이대로 멸망이 도래하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평화로운 지금을, 궁금한 것에 대해 들으면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아 침묵을 고수했다. 그런 유중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상아 역시 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묵묵히 곁에 서서 걸었다. 아까의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그게 유중혁은 편했다.
태풍 여자 고등학교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었는지 인영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밝고 경쾌한 목소리였다. 가벼운 트레이닝 복을 입은 여자의 복장은 위아래가 길었다. 검은 머리를 높게 묵은 여자는 손을 높이 뻗어 붕붕 흔들며 다가오다가 여자 곁에서 걷던 유중혁을 보자 행동을 멈췄다.
“……사, 음.”
어렴풋이 들렸다. 사? 의문을 재기하듯 살풋 찡그린 미간에 멈쳤던 여자가 조금 허무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네. 거짓말은 아니네. 변함 없구나. 자신을 보며 중얼거리는 여자와의 거리는 어느새 바짝 좁혀져 있었다. 이 여자도 자신을 안다. 희한한 일이었다. 잊은 것은 없었으나 이들 사이에 있으면 꼭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질적인 것은 이들인데 꼭 자신이 잘못 끼워진 퍼즐조각 같았다. 잠시 느꼈던 둥지의 기분이 서서히 사라짐을 느꼈다. 문득 희멀건 남자 한 명이 생각났다. 그도 나를 알까. 알면서 몰랐던 척을 한 걸까. 그런 생각. 시선은 여전히 트레이닝 복을 입은 여자에게로 향한 채였다.
“다른 사람들은 뭐래?”
“무리 했대요. 그만큼 했으면 그만 해도 되지 않나 싶은데 또 그랬대요. 진짜 못말려. 그래서 다들 서두르나봐요. 우리도 빨리 가야할 것 같아요.”
여자의 말에 유상아는 침음을 흘리다 결국 한숨을 뱉었다. 못 믿는 건지, 조심성이 남다른건지. 혹은……. 옆의 자연스럽게 옆의 남자에게 시선이 흘러갔다. 기억이라도 뒤지는 듯 조금 굳은 표정으로 지혜를 내려다보는 시선엔 작은 혼란이 일렁였다. 그럴만도 하지. 그러나 유상아는 그 혼란을 모른척했다. 갈 길이 바빴다.
“이쪽은 이지혜에요. 보다시피 태풍여고 학생이고요.”
그리곤 짧게 울리는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제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미는 이지혜의 손을 무시하곤 유상아를 살폈다. 핸드폰을 한참 살펴보더니 곧 한숨과 함께 어설픈 웃음을 얼굴에 걸쳤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아까부터 자신만 모를 소리를 했다. 이번엔 제대로 잘못 끼워맞춰진 느낌을 받았다. 비어있는 손을 펼쳐 그곳을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알고싶지 않아도 알게 될 테니까요.”
“또 누군가가 있나?”
“동료요? 그럼요. 이번엔 혼자가 아니에요.”
“그들도 나를 알고 있나?”
“가서 확인 해볼래요?”
“김독자를 아나?”
그리고 대화가 멈췄다. 제 입에서 그 물음이 나올 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인건가? 그들의 반응이 예상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런 표정이 담기지 않은 두 쌍의 시선이 자신을 올려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냐는 듯 들여다보는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곧 이지혜의 시선이 떨어졌고, 유상아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당최 갈피를 잡지 못해 입매가 우그러졌다. 아까 풀어지던 그 표정은 뭐지? 질문이 질문을 낳았다.
“일단은 이동할까요? 조금 급해졌어요.”
“무슨 일이 생겼나보군.”
“네, 맞아요. 생각보다 조금 틀어져서 당황스럽네요.”
그만큼 얼마나 간절한지 알만하기도 하고요. 가볍게 덧붙이는 말이 익숙하다는 듯이 굴었다. 이지혜는 느린 걸음으로 저만치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이지혜의 등을 바라보던 유상아 역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 명의 등을 바라봤다. 어딘가 기이한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전부 다. 어느덧 해가 절반쯤 몸을 기울었다. 저 끄트머리쯤에서 노란 물이 들기 시작했다. 시간은 이미 오후 네 시를 훌쩍 넘겼다. 이젠 어떻게 될지 모를 미지의 세계 뿐이었다.
마음속에 두었던 이 주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젠 쓸모 없어질 것이 뻔했다. 온갖 변수들 천지였다. 오히려 첫 날과 똑같이 흘러가면 그것에 놀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어느덧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던 유중혁 역시 발을 내딛었다.
*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이상하게 차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거대한 대교 앞에서 짝다리를 짚은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단발의 여자였다. 인기척이 들렸는지 단발의 여자는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바라봤다. 광활한 한강 위를 가로지르는 동호대교. 어쩐지 뇌 한켠의 기억 하나가 스멀스멀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후각을 간지럽히고 달아하는 물비린내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부 가득 차오르는 여름의 습한 공기에 찝찝함을 느꼈다. 저녁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더위는 여전했다. 식을 줄 모르는 지독한 여름의 열기는 악착같았다.
이번에 닿아오는 시선은 조금 달랐다. 한쪽 눈썹이 들썩이더니 보지 못했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 봤지만 못 본 척 소리 나게 몸을 돌렸다. 몇 사람 만나보지 못했지만, 오늘 하루 처음 받는 냉대였다. 그러나 유중혁은 덤덤했다. 오히려 이런 편이 나았다. 꼭 자신만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시키지 않아도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혼자 대교를 가로지르는 여자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유상아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짧게 웃는다.
“처음에 말했던 그 사람이에요. 뭐……, 일단 동료네요.”
동료네요, 하고 웃음을 흘리는 유상아는 언니 같이가! 하고 뛰쳐나가는 이지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모든 것이 익숙하다는 듯이 행동했다. 여기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 뿐이라는게 더더욱 두드러졌다. 동료.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에, 관계에 도태되어 가는데 이 사람들은 여전히 나의 동료인가?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물음은 결국 소멸되었다.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은 발치로 처박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어차피 인정하고 말고는 자신에게 있었다. 두 개의 선택지를 쥐고 있음에도 답답한 심정은 뭘까. 여전히 제 손에 꽉 들어찬 손잡이를 꾹 쥐었다. 한껏 예민해진 유중혁을 익숙하게 바라보던 유상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여전히 맑게 갠 하늘이었다. 그대로 눈만 굴려 유중혁을 바라봤다. 한강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다. 수면 아래를 꿰뚫듯이 바라보는 망막은 지워지지 못한 회귀자의 고독함이 고여있었다. 변함없는 이었다. 유상아는 그것이 못내 다행스러웠고 동시에 안쓰러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필히 가만두지 않을테지만. 유상아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서서히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은. 해는 수면 너머로 침몰하는 중이었고, 하늘은 주홍빛과 보랏빛, 그리고 쪽빛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던 중이었다. 유중혁은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결국 멸망이 도래했다. 많은 변수가 있었으나, 멸망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또 이렇게 되는 건가. 온갖 변수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데 여기서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적절한 차선택을 하기 위해서였다. 패닉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성적이게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이미 대교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세 사람은 보지 못한 듯 걸음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몰려들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보기만 해도 묵직해보이는 먹구름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정도 구름이라면 서울 시내가 잠겨버릴 지도 모를 정도의 규모였다. 그럼에도 셋은 꿋꿋하게 걸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종종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듯 했다. 쿠르릉. 하늘이 울었다. 유중혁의 미간이 깊게 패인다. 동료. 그 단어가 이젠 심하게 거슬렸다. 동료. 나를 아는 듯한 언행, 익숙한 제스쳐. 편안한 말투. 만약 진짜 이들이 자신의 사람이라면? 진천패도를 쥔 손아귀엔 힘이 들어갔다. 이제 곧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찢어질 때였다.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어냈다. 나의 사명은 그들을 지켜내는 것. 걷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그와 동시에 기어코 찢어진 하늘. 그제야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봤고,
“유중혁!”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몸으로 날아온 무언가에 대교 한 켠으로 밀쳐지듯 넘어졌다. 등허리에 둔탁한 고통이 스민다. 입가엔 차마 삼키지 못한 신음이 잘게 튀어나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제가 있던 자리를 쳐다보자 그 자리엔 무언가를 휘두른 듯 깊게 파인 자국이 존재했다.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몸이 절반으로 갈라져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제게 달려든 존재를 봤다. 둥그렇고 가지런한 가마. 검고 얇은 머리카락.
“……김독자.”
“하……다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길래 한시름 덜었더니, 바뀌지 않기는 무슨.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아까의 그 김독자는 어디로 갔는가. 거침없이 말을 뱉는 김독자를 조금 낯선 눈빛으로 쳐다봤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히자 희멀건 낯갗에는 애매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좀 비키지.”
“아, 미안. 어디 다치진 않았어?”
“네 그 몸을 날려서 밀쳤는데 다치지 않은 곳이 없을 리가 없지 않나?”
그말에 김독자는 웃었다. 어쩐지 이 모습이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슬금슬금 멀어지는 몸에 유중혁은 짧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하늘을 바라보니 이미 괴수들을 몽땅 토해낸 듯 하늘이 찢어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한강으로 돌렸다. 다리 바로 아래엔 날뛰는 수룡들이 존재했다. 조금 악취가 나는 물비린내가 일렁인다. 질색하는 표정을 지은 유중혁이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중혁아, 잘 들어. 우리는 이 다리를 건너서 금호역을 지나서 충무로로 향할거야.”
“왜?”
물음에 그 남자는 애매한 표정을 하며 살짝 웃었다. 곤란할 때면 짓는 표정 같았다.
“그곳에는 네 동료가 있어.”
“아까부터 처음 보는 사람들이 동료, 동료 타령을 하더군.”
“그래. 그들 모두 너의 소중한 동료야.”
평온하게 말을 잇는 그 남자도 무언가를 아는 듯 싶었다. 살펴보니 옷차림도 바뀌어있었다. 어디서 난 것인지 검은 셔츠에 흰 코트를 몸에 두른 채였다. 교복을 입었을 때는 제법 엣된 티가 났으나, 지금은 조금 더 성숙해 진 것 같았다. 유중혁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는 벌써 대교를 다 건넌 이들이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둘 만의 시간을 주겠다는 듯이 멀찍이서. 그러나 시선은 떼지 않았다. 여차하면 바로 달려들 태세라도 하는 듯 우직하게 서있었다.
“……온통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 투성이군.”
“너무 속상해하지는 마. 결국 다 기억해 낼 거야.”
또 같은 말. 입술 사이를 가르고 짧은 한숨이 떨어진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도 언뜻 흘려보냈다. 그런 유중혁은 남자는 조용히 바라봤다.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조심스럽고, 애달프게. 그런 시선에 의문을 느꼈다. 그러나 입을 떼려는 순간 그 수두룩한 감정들은 신기루처럼 갈무리 된 뒤였다. 너무 깔끔해서 헛것을 본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할 정도였다.
“걱정하지마. 나는, 우리는 너를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말했잖아, 동료라고.”
그 남자가 유중혁의 곁을 무심히 스쳐지나갔다. 어렴풋하게 그리운 향기가 스쳐지나갔다.
“동료는 그런거야. 너를 위해서 만도 아니고,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기도 하니까.”
그와 동시에 유중혁은 문득,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기억을 엿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다음 구역으로 가는 방법 역시 두 다리를 이용해 걷는 것 뿐이었다. 가는 동안 한 사람을 더 만났다. 정희원이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꽤 털털한 사람으로 그녀 역시 다른 이들과의 첫만남과 비슷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별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런 면이 유중혁은 만족했다. 그럼에도 동료는 더 있었다. 금호역을 지나 충무로로 향하며 그들의 설명을 들었다. 많은 이들이 함께했고, 함께할 예정이었다. 괴수들을 만날때면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한 팀, 혹은 두 팀으로 나뉘어 쐐 좋은 실력을 발휘해냈다. 조금의 상처가 뒤따랐지만,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들 사이에서 진천패도를 휘둘렀다. 어쩐지 그들의 말처럼 ‘동료’가 된 기분이 이따금씩 들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난 후 그 무리들을 볼때면 유중혁은 알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이 상황들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때. 그들이 자신을 익숙하게 부를 때, 서로를 알고 있다는 듯 가벼운 농담이나 대화들이 오갈 때,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히면 이따금 슬픈 감정을 내비칠 때. 그리고
“중혁아.”
그 남자가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부를 때. 검게 칠해진 밤하늘 아래서 그 남자를 바라봤다. 전처럼은 아니지만 여전히 흐리멍텅한 이목구비였다.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으면 기억이 날듯말 듯 하게 만드는 그런 흐릿함. 유중혁은 김독자의 낯빛을 살폈다. 근처에 피운 모닥불이 일렁일 때마다 음영의 모양이 바뀌어 낯선 모습도, 익숙한 모습도 보였다. 절반은 빛에, 또 다른 절반은 어둠에 먹힌 채 자신을 또렷하게 바라보고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어둠에 잡아먹힐 것 같아 보이는 것은 착각인가. 잡지 않으면 곧장 어둠이 넘실거리는 곳으로 쏟아질 것 같아서 유중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 거두었다.
시선이 맞물린다. 끝에서 물비린내가 나던 문장과는 다르게 눈빛은 담담했다. 그러나 유중혁은 알았다. 담담함을 가장한 그 감정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 보이는 감정의 실타래를. 인내, 슬픔, 괴로움, 공포, 안도감, 희망, 동시에 불안감,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런 것들. 다소 난폭한 감정들이 일렁이다가 모습을 감췄고, 또 다시 튀어나왔다가 얼마가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마치 만물을 삼켜내는 깊은 해저와도 같았다.
때문에 유중혁은 다음 말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특히 이 남자를 볼 때마다 묘하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감정이 자신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함이 일었다. 가장 큰 답답함은 뺵빽한 기억들의 공간 사이에서 간극을 찾는 일이었다. 수없이 뒤집고, 반대로 쏟아봐도 도무지 이 막대한 기억들이 존재할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적지않은 사람들을 이정도로 동료애가 짙어질 만큼 오래 있을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이 사람들을 자신이 끌어당겼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왜? 어째서? 이제껏 평화로웠던 시간 사이에서 ‘동료’가 필요한 이유가 뭐지? 유중혁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입을 열기만을 침착하게 기다렸다.
“……아니야. 애들 만났더니 어때? 꽤 괜찮지?”
“너희가 그렇게 말하는 ‘동료’를 말하는 건가?”
“응, 그래. 동료.”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이 익숙한 편안함이 유중혁은 꺼림직했다. 조근조근 말을 읊는 김독자의 목소리에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홀로 이 길목을 걷던 일이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때도 이 남자는 없었다. 이곳을 언제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많은 인원이 있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난 다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응, 그럴 거야. 알고 있어. 이해해. 괜찮아.”
꼭 어린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미간 사이에 주름이 패인다. 그 모습에 남자는 그냥 웃었다. 이런 면은 여전하구나.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조심스러운 언행. 자신도 느낄 정도로 애뜻하게 바라보면서 결코 가까이엔 다가오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놈이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아 몸을 휙 돌렸다.
그럼에도 잡는 손길 하나도 없었다. 말 걸고 싶어 여기까지 찾아온 녀석 아니던가? 그러면서 보내기는 또 잘 보냈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적당히 멀진 않으나 아무도 없는 쪽으로 가 근처에 몸을 기댔다. 말을 걸지 말라는 듯이 진천패도를 꾹 쥔 채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잠을 자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아무하고도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지나치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태양이 느리게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묘하게 탁해진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가 습관처럼 핸드폰 시계를 들여다봤다. 08:53. 몸을 바로 세우자 근육들이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완전히 일어나 두어 번 몸을 털고 이리저리 움직여 근육을 풀어냈다. 비로소 아우성이 조금 잠잠해진 것 같았다. 야영을 한 적은 처음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익숙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또다른 의문점이 고개를 들었다. 손아귀에 잡힌 진천패도를 바라봤다. 이것과 같은 현상일까.
그러다가 문득, 자신을 쳐다보는 작은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을 휘휘 둘러봐도 보이지 않자 이번엔 시선을 살짝 내렸다. 꽤 어려보이는 듯한 아이가 울망울망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공포감에 휩쌓인 것은 아니었다. 우물우물,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니 익숙한 남자가 서있었다.
“김독자.”
“좋은 아침이야, 중혁아. ……잘 잤어?”
“그렇게 말하는 네 꼴은 말이 아니군.”
말 그대로였다. 잠을 설쳤는지 피부는 조금 퍼석해진 것 같고, 눈 아래엔 미약한 다크서클이 보였다. 조금 잠을 설쳐서. 손을 뻗어 제 다리에 달라붙은 작은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꽤 익숙한 듯 보였다. 그 여자애는 그 남자의 다리에 달라붙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대단히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끝내 말하지 못하고 다른 쪽으로 뛰어갔다.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보던 그 남자는 유중혁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오늘 처음 봤지? 유승이야. 신유승.”
“어린 아이군.”
“응, 많이 어리긴 해. 그래도 씩씩해, 많이. 고마우면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말에는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너는 늘 이렇게 타인에게 진심을 말하나? 타인이라는 단어에 이 남자는 행동을 멈췄다. 눈만 두어 번 깜빡였을 뿐이었다. 타인. 유중혁의 입에서 나온 것과는 상반된 느낌의 단어였다. 분명 뜻도, 음절 하나하나도 다른게 없었으나 그렇게 느껴졌다. 시선이 닿는다. 그제야 미적지근한 웃음을 담는다.
“동료라니까.”
“잠을 설쳤나?”
그 말에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돌렸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과 함께 전진할 때마다 작은 기억들이 어렴풋하게 떠오르긴 했다. 그에 싸울 때마다 몸이 익숙함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모습이 괘씸해서 그랬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답지않은 작은 심술이다. 남자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짓말이 필요한 말 자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쨌든 숨기는 것은 있다는 말이었다. 자신도 왜 이렇게 삐딱선을 타는지 몰랐다. 그냥 그렇게 애닳고, 애뜻하고, 간절한 낯간지럽고 묵직한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언질 한 번 해주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남자와 무슨 관계였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범상치 않았던 관계였던 것은 알았다. 유중혁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오늘은 또 어디를 가지?”
말하지 않을 거라면 쓸데없이 말 걸지 말라는 소리였다.
*
간단한 아침을 챙기고 또 다시 부지런히 걸었다. 어제와는 급이 다른 괴수들이 튀어나와 종종 앞길을 막았다. 어제보단 버거웠으나 할만 했다. 곁에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유중혁은 허무하게 보냈던 이 주의 시간을 기억해냈다가 차츰 지워갔다. 이제는 쓸모 없어진 것들이니 모두 폐기해버리는 것이 맞았다. 그는 익숙하게 몸에 베인 행동으로 괴수들을 베어나갔고, 주변의 사람들 역시 자신이 맡은 바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충무로에 도착했다. 어제보다 너덜너덜해진 몸은 휴식을 외쳤고, 유중혁은 살인적이게 내리쬐는 햇빛을 가리려 손을 들어올렸다. 걸어오며 시선 사이로 늘어진 반파된 건물들은 이제야 세계의 멸망이 도래했다는 것이 현실감있게 다가왔다. 간간히 코를 훑고 지나가는 피비린내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의 굶주린 울음소리. 과거에 학교였던 것은 반쯤 무너져 내려 더이상 아이들이 뛰어놀지 않았고, 공원에는 산책하는 사람들 대신 시체를 질질 끄는 괴수들만이 우글거렸다. 대학교는 더 이상 재기능을 하지 못한 채로 사람들의 아지트로 쓰였으며, 병원은 출입문과 창문을 꼭꼭 닫은 채 소수의 생존자만을 들이며 방어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것 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죽었고, 살아났으며, 생존해나갔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모두들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또한 자신도 알아남을 것이다. 모두를 구해서. 고개를 들어 충무로 역을 바라봤다. 그 아래엔 그늘에 앉아있었는지 천천히 일어나는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독자 형!”
저 멀리서 남자 아이가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 뒤로는 체격이 꽤 큼지막한 성인 남성이 천천히 다가왔다.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 담긴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아이는 그 남자가 소개 시켜주었던 신유승과 또래로 보였다. 친근하게 형, 형 거리던 아이는 남자 곁에 있던 신유승이 시비를 걸자 금방 그쪽으로 몸을 돌려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익숙하다는 듯이 그쪽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꼬마애는 길영이야. 이길영. 그리고 저기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은 현성씨.”
“저 둘은 사이가 별로 좋지않은가 보지?”
“종종.”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김독자의 시선은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로이 제 몸을 불사르며 수십가지의 모양으로 변화하는 그것을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입 밖으로 한 번도 내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자신이 이 말을 건네면, 그들은 똑같이 그 미묘한 표정을 지을게 뻔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기 골란 한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은 늘 있었다. 그러나 생각과 실제로 가지는 기분의 간극은 꽤 거리감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독자에게 말하려는 것은 단순한 충동 때문이 아니었다. 가장 자신에게 많은 표정을 보여줘서도 아니었다. 단 하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언제나, 늘.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은근히 따라오던 시선. 어딜 가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든. 늘 그의 시선엔 자신이 걸려 있음을 안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한 번 의식하고 나니, 그 시선이 지독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입을 여는 것이었다. 우리 둘의 관계가 마냥 가볍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난 이곳에 불시착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이곳은 네 세계야. 명백해.”
“‘동료’를 볼 때마다 널찍한 간극을 마주하면, 순식간에 유리벽 하나가 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기분이 들어.”
“…….”
“너희는 늘 말했지. 내 동료라고. 그런데 동료라는 그 틀 안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는 기분을, 너는 아나?”
시선을 살짝만 돌려 김독자를 바라봤다. 괴롭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었다. 자신이 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프다는 듯 그런 표정을 지었다. 이상했다. 나름 강단있는 남자임을 알았다. 적당히 이성적이고, 필요할 만큼 감정적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가면을 만들어 낸 사람일지도 모르지. 그는 지독하게 많은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듯이 행동했고, ‘동료’들은 모두 김독자를 믿고, 따랐다. 그 어떤 일에도 이성을 유지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그게 자신이었다. 늘 어쩔 줄 몰라했다. 새 물건을 받은 아이 같기도 했고, 귀공품을 깨트릴까봐 조마조마해하는 수집가 같기도 했다.
자신이 그렇게 깨질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김독자의 눈짓, 손짓 하나하나가 그랬다. 서투르고, 애달프고, 조심스러웠다. 그런 그가 신기했다. 도대체 어떤 감정을 공유하는 거지? 시선으로 물었으나 김독자는 대답이 없었다.
“……됐다. 화풀이를 하거나 원망을 하는 건 아니야. 그냥 풀 곳이 없어 네게 말한거다. 신경쓰진 마.”
그런 표정을 지으니 괜히 잘못 한 것도 없으면서 묘하게 죄책감을 자극시키게 만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살풋 미간을 찌푸린 아주 작은 표정 변화임에도 김독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런 표정이 보기 싫어 고개를 휙, 돌렸다. 건너편에서 신유승과 이길영이 서로에게 기댄 채 모포를 덮고 곤히 자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제 한 손이 누군가에게 끌려갔다.
“이곳은 틀림없는 너의 세계야, 중혁아.”
손을 잡아 끈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김독자였다. 아까처럼 감정적이게 일렁이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감정의 여운은 남아있어 그 얼굴이 퍽 슬퍼보였다. 손을 쥔 손아귀의 힘은 세기 않았다. 뿌리친다면 쉽게 뿌리칠 수 있을 만큼의 힘. 그럼에도 유중혁은 손을 빼지 않았다. 뺄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너를 기다리는 또 다른 세계가 있어.”
시선이 제 손으로 향했다. 한 손으로 제 손을 쥐던 손은 손가락 사이를 느리게 파고들었다. 퍽 다정한 연인처럼 깍지를 낀 김독자가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낯설어 살짝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나올 때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웠다.
“우리는 그곳에서 너를 위해 불시착한 너의 동료야.”
그의 입술이 손가락을 가볍게 파고 들었다가 멀어졌다.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그럼에도 긴장했는지 김독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우리’에 김독자 너도 포함이 되어있나? 유중혁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순 없었다. 그가 깍지 끽 손에 이마를 기댄 체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었으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믿고 따라와주라. 그곳은 너를 필요로 해.”
나 역시 그곳을 필요로하나? 이 말 역시 묻지 못했다. 묵묵히 손을 내어준 채 둥그런 가마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
두 번의 경험이 무색할 정도로 수월하게 살아남았다. 아직 30일이라는 시간이 다 지나지 않았음에도 이번엔 이 시나리오를 끝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혹은 내가 모르는 기억들은 어떤 장소에 갈 때마다 꾸준하게 피어올랐다. 안개가 서린 창문으로 그 너머를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안에서 무언가가 형성되어감을 느꼈다. 모두 처음 보는 기억들이었지만 원래 제 것이라는 듯이 거부감 하나 없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김독자는 자신을 묵묵히 쳐다봤다. 이따금씩 표정을 숨길 수 없을 때면 으쓱이며 웃었다.
떠오른 것은 기억 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감정들도 함께 떠올랐다. 이를테면 그들이 그렇게 말하던 ‘동료’의 은근한 유대감이라거나, 김독자에 대한 기묘한 감정.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핸드폰을 쥔 채로 먼 곳을 바라보는 김독자를 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가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히기라도할 때면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기도 했었다.
“갈수록 자세가 더 좋아지는게 보이네요.”
“계속 이동할 때마다 익숙해 지는 것 같더군.”
“다행이네요.”
제 곁으로 잠시 다가온 유상아와의 짧은 대화가 끝나자 다시 침묵이 갈아앉았다. 뿌연 기억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전부 1인칭 시점이었으며, 지금 함께하는 이들이 곁에 함께하거나 보이지 않음에도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고, 그들을 향한 감정이 미약하게나마 전달 되었다. 이것은 나의 기억인가? 그게 아니라면 타인의 기억인가? 애매함을 품은 눈빛이 유상아를 바라봤다.
“뭔가 묻고 싶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내 물음을 믿을지 모르겠지만.”
“설마요. 일단 말해보세요. 동료니까요.”
“……어딘가에 도착 할 때마다 기억들이 어렴풋이 생겨난다. 이건 내 것인가?”
“당신의 것이지만, 동시에 당신의 것이 아니기도 해요.”
애매한 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기억. 손을 들어 이마를 느리게 문질렀다. 시선이 굴러 흰 가운의 끝을 자연스럽게 쫓았다. 그러나 곧 전부 유중혁씨의 것이 될 거예요. 의미심장하면서도 단단한 문장이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그 말에 그저 빙그레 웃었다. 가장 유해 보이면서도 가장 단단한 사람이 유상아였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보지.”
“뭐든 물어보세요.”
“꼭 전부 말해줄 것처럼 구는군.”
은근슬쩍 감추는 것이 있으면서. 서늘한 시선에 유상아는 그저 웃었다.
“그래서 뭘 물어보게요?”
“김독자와 나는 무슨 관계였지?”
과거형으로 물었다. 그러나 사실 과거형으로 치부할 수 있는 관계성일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이에 유상아는 그저 시선을 옮겨 그 남자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표정은 고요했다. 드넓은 바다의 한복판처럼 잠잠한 수면을 엿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깊이가 무수히 깊어 내면의 감정은 알기 어려웠다. 탐색하듯 살펴봐도 꽁꽁 숨긴 감정은 알래야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다. 묘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금방 휘었다.
“글쎄요. 그런 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여러모로요.”
그리곤 조용히 올려다 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무언가의 말을 건네듯 길게 머물렀던 시선이었으나, 유중혁은 알 턱이 없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현성과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입가에는 잔잔한 웃음이 덧그려져 있었다. 늘 그의 다리에는 이길영과 신유승이 붙어 있었다. 저들이 나의 ‘동료’라고? 유중혁은 느리게 눈썹을 우그려트렸다.
꽤 늦은 새벽. 거의 대부분이 눈을 붙인 채 얕은 잠을 자던 시간이었다. 제 곁에서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자는 척 눈을 계속 감고 있자 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러기를 잠깐. 아주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작은 온기가 얼굴에 닿는 것을 느꼈다.
선을 따라 덧그리는 손끝의 궤도는 어쩐지 조심스러웠고, 망막 너머로 이곳에 정체된 시선을 느꼈다. 여름의 습하고 미적지근한 바람이 둘 사이를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이제는 소리가 줄어든 매미 소리가 곁을 떠돈다. 뜨뜬미지근한 분위기가 감돌더니만, 인기척이 멀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눈을 떴다. 누가 왔다 갔냐는 듯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주변을 바라보다가 어느 한 곳을 조용히 응망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 밤의 어둠이 켜켜히 쌓여있는 그 작은 공간 속. 어렴풋이 하얗고 작은 불빛이 보이는 듯도 했다. 김독자. 유중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묘하게 울렁이는 가슴께가 낯설었다. 늘 뿌연 시선 너머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 무수히 많은 감정들이 함축되어 있는 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쪽은 기억 속의 자신이었다.
담담한 남자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은근히 요동쳤다. 아직까진 확실하고 강렬한 감정은 아니었다. 잔잔하고, 울림없는 것들. 그러나 그 깊이를 무시하기 어려운 막대한 감정. 지금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관계였다. 그 사이의 간극이 궁금했다.
“김독자.”
김독자. 기억 속의 자신이 수없이 되뇌이던 이름. 이젠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에 감정의 무게가 더해지기도 했다. 묵직한 울림에 핸드폰을 바라보던 남자의 고개가 바람소리를 내듯 들렸다. 적잖게 놀란 듯 눈을 조금 동그랗게 뜬 채였다. 그 모습을 적막하게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해야하는 지 모르는 남자의 입이 두어 번 뻐끔거리다가 이내 다물어졌다. 벽에 등을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안 자고 뭐해?”
“물어 볼 것이 있다.”
제 말에 어둠이 드리워진 낯짝위로 오묘함이 지나갔다. 조금 긴장 한 듯 시선은 제게로 머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얼굴 위로 그가 덧그린 온기가 천천히 되살아나는 듯 했다. 앞머리에 살짝 가려진 둥근 이마부터 시작해서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와 광대뼈와 뺨을 가로질러, 마침내 턱선 위로 도달했던, 그 짧은 움직임. 시선이 잠시 그 손끝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남자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와 나는 무슨 사이였지?”
그 물음에 일순 남자의 표정이 허물어 졌다가 익숙하게 재건축 됨을 느꼈다.
“그건 왜, 중혁아?”
“넌 모르지. 네가 무슨 눈빛을 하고 날 바라보는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어.”
“그리고 또 모를 거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기억 속의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밤하늘을 인 남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은 언뜻 우주를 담은 듯 했다. 대답해, 김독자. 그가 고여있는 어둠 사이로 성큼 다가갔다. 달빛 아래에서 절반 정도가 그가 서있는 어둠에 물들었다. 제게서 살짝 떨어진 시선은 다시 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앞에 서서 조용히 내려다봤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지. 난 네게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까지 하는 거지?”
“뭐를?”
“네가 내 ‘동료’라고 칭하는 이들은 전부 너를 중심으로 구축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 그리고 그 사이에서 너는 부탁이라거나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 보이던데.”
“…….”
“네가 그들을 나를 위해 여기까지 온 ‘동료’라고 칭했지. 그들을 이용해서 날 이렇게까지 도와지는 이유가 뭐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던 남자는 제 발치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혹은 정리하는 듯 꾹 다물린 입술을 벌어질 생각이 없었고 살짝 숙여진 고개는 미동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고개를 들 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모든 것을 정리한 듯, 혹은 포기했다는 듯 초연한 얼굴이었다. 음, 하고 문장을 고르는 남자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굴렀다가 마침내 제게로 도달했다. 입가에는 여전히 얕은 망설임이 존재했다.
“중혁아.”
그의 손이 뻗어와 제 옷자락을 쥐었다. 언제던가, 김독자가 제게 건넸던 검은색 코트 자락 이었다. 이 이야기를 네가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우리는 너무 많은 간극을 사이에 두고 있거든. 그래서 너는 다 듣고 나면 거짓말 치지 말라고 비웃음을 지을지도 몰라. 그래도 듣고 싶다면……그래. 언젠가는 알 수 밖에 없을 것들이니까.
중얼중얼, 홀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의 운을 떼는 김독자의 말소리는 한 여름밤을 잠재우는 자장가와도 비슷했다. 차분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듯 꽤 무덤덤해 보였다. 잠시 말을 끊은 김독자는 자신을 살짝 올려다 봤다.
김독자는 자신이 그를 구원했고 했다. 이것을 서두로 김독자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유중혁이 구원의 원천이라는 것을 앎에도 억지로 그에게 구원이라는 단어를 뒤짚어 씌웠다. 그리하여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구원 당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사랑 받는 것이 어설픈 그에게 사랑을 건넸고, 서툰 그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서선 묵묵히 기다렸다. 사람을 아낄 줄을 몰랐다. 자신을 아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아끼는 것 역시 조금 어려웠다. 자신을 아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할 줄도 몰랐다. 앞서 나열한 것들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성애적인 사랑. 살면서 단 한번도 가까이 느껴본적이 없던 것을 그가 처음 가르쳤다. 어설프고 낯설다. 낯설어서 처음엔 도망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미 중독되어 버렸기에 아닌 척 되돌아왔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이미 김독자 곳곳에 유중혁이 묻어나 도망가도 여전히 그의 곁에서 맴도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먼 길을 헤매는 척 다시 돌아왔어도 유중혁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유중혁.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마디에 시선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제는 다르게 보이는 그가 낯설면서 기꺼웠다. 어색해서 머뭇거리는 김독자를 위해 유중혁은 처음으로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래, 김독자.
발이 땅에 붙은 듯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시에 당장이라도 그에게 뛰어들고 싶었다. 달콤한 유혹. 위험함을 앎에도 끊기 힘든 지독한 독. 그럼에도 김독자는 기꺼이 그것을 감내할 준비를 했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떠 시야에 그를 아름 담아보다가, 이내 그에게 뛰어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러나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는 팔이 있어 두렵지 않았다. 은근하게 허공을 맴돌던 그의 향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온몸을 감쌌다. 이제야 불안함이 가셨다. 사랑해.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았다. 그랬기에 더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그에게 전해야만 했다. 그토록 기다려온 그를 위하여. 그가 내려 준 구원에 대한 답례였다.
그런데 자신을 감싸던 것들이 일순 무너졌다. 순식간이었다. 급박했던 그날과도 같았다. 유중혁. 눈 떠, 제발. 흐려져 가는 의식 속으로 파들어가려고 애썼다. 그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코 앞에서 아무것도 못한 다는 것이 이토록 무기력한 일이었나. 자의로 성좌가 되고 나서 처음 느끼는 허탈함과 무력함과 공포심이었다. 제발, 살아나……. 낮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슬픔이 정도를 모르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다. 암울함과 우울함이 어깨를 감쌌다. 죽음의 숨결이 코앞이다. 오르내리던 가슴팍도 이젠 거의 미동이 없었다.
[성흔, ‘회귀 Lv.3’이 발동합니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유중혁을 잃을 수 없었다. 그 후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랬다. 서서히 설화가 떨어져나가는 것은 애써 막았다. 잔 숨이 떨린다. 삼키지 못한 아픔과 고통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이렇게까지 아픈 적은 결코 없었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떨어져나가는 설화들을, 옷가지들을 우왁스럽게 쥐었다.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듯 절박하고, 애절하고, 고집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때 제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 힘없이 얹혀진 것이었으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는 겨우 눈을 뜨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지그시 보던 유중혁의 손아귀에는 아주 미약한 힘이 깃들었다.
김독자, 잘 들어라. 난 오늘 또 다시 회귀를 거부할 것이다. 오로지 너를 믿고, 나는 내가 다시 이번 회차에서 눈을 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건 너를, 너희들만을 믿는 게 아니야. 스스로를 믿기 때문이기도 해. 그러니까……,
어느새 뒤통수까지 올라온 손이 김독자의 머리를 푹 눌렀다. 아까와 같이 푹 파묻힌 채로 김독자는 색색 숨을 내쉬었다. 두어 번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꾹 감는다.
[화신 ‘유중혁’이 회귀를 거부합니다.]
두 번째로,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에게 저항하던 날이었다.
*
첫날의 아침처럼 날씨가 깨나 좋았다. 여전히 은근한 화약 냄새라거나 그 사이에서 섞여 맡아지는 피비린내는 여전했으나, 이제는 일상처럼 느껴졌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그 시간들. 유중혁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하늘을 짚었다.
오늘로 딱 한달이 되는 날이다. 그 갑작스러운 시나리오의 종지부가 슬슬 머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하나 둘씩 일어나며 하나같이 새삼스레 하늘을 올려다봤고, 짧은 아침을 보내며 시덥지 않은 대화라거나 농담을 주고받았다. 평소와 같은 나날이었다.
이제껏 계속해서 엇비슷한 나날들을 보내왔다. 처음과 달라진 것은 김독자와의 관계성 뿐, 그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던 탓이었다. 어색해하던 초반과는 달리 이제는 꽤 그럴싸한 분위기가 종종 만들어지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손을 잡고 있다거나, 시선이 허공에서 부닥칠 때면 김독자가 빙그르르 웃어준다거나, 이따금씩 서로를 가득 포옹 한 채 아무말 없이 한여름 그 간격에서 가만히 서있다거나 하는 것들. 그런 묘한 분위기에 다른 이들은 은근슬쩍 자리를 피해준다거나 하는 행동이 이따금씩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유중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날이 지나면, 나는 우리는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답 없는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제 손아귀에 들어찬 김독자의 온기를 느끼며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더듬더듬 기어 올랐다. 전에 언급했던 불시착이라는 단어로 생각하건데, 자신과 함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가능성이 가장 유력했지만, 자신이 사라진 이 남은 시간들은 어떻게 되는 지 알 턱이 없었다.
시선을 돌려 김독자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던 시선이 데구륵 굴러 시선을 마주했다.
“김독자,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나?”
그 말에 시선이 좀 더 위로 올라갔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원래 우리는 그곳에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남겨진 시간은?”
그리고 드리워진 미묘한 표정. 시선이 앞을 향했다. 이제는 완전히 폐허가 된 서울의 일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물감을 엎은 듯 새파랗게 칠해진 하늘 아래 무너져 내리는 회색 도시들. 그 사이를 유유히 걸어다니는 괴수들과 간간히 눈에 띄는 핏자국들은 이젠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들이었다.
손 사이로 열기가 지속되자 차오른 땀에 다시 고쳐 잡으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뿌연 기억들은 이제 대부분 찾은 듯 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자신과 그들 사이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이 종종 말하곤 하던 과거아닌 과거의 이야기를 이젠 알아 들었고, 그들의 분위기에 쉽게 녹아들었다. 여전히 그 대화 무리에 끼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거북함을 느끼지 않았다. 이젠 완전히 그들과 함께 해온 동료라고 해도 믿을 정도 였기에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현재에 대해 그다지 미련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김독자의 답을 막연하게 기다리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김독자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여름바람이 불어 둘 사이를 잠시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서 어서 오라고 재촉 하는 듯 전부 뒤돌아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저 앞에서 기다려주는 이가 있었고, 곁에는 함께 걷는 이가 있었다. 유중혁은 말을 덧붙혔다.
“됐다. 방금 물어본 말은 잊어도 상관 없어.”
*
이른 오후부터 저 멀리 심상치 않은 먹구름이 어렴풋하게 보이더니 이제는 바로 위에서 불안한 소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신유승과 이길영의 고개가 하늘을 향해 들렸는데 비가 오려는 모습에 걱정이 되는 듯 어린 낯짝에 그늘이 졌다.
그런 아이들의 둥근 가마 위로는 김독자의 손길이 한 번씩은 스쳤다. 아저씨, 비가 오려나봐요. 형, 형. 비 오면 어떡해요? 글쎄……잠시 어디서 좀 쉬었다가 갈까? 아이들과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은 상황과 맞지않게 담백하기만 했다.
그런 대화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은 기어코 눈물을 툭툭, 터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두어 방울을 가끔씩 떨어트리던 것이 이제는 그 수를 늘려 무수히 많은 빗물들을 쏟아부어냈다. 소나기라도 되는 듯 그 그 양이 상당히 많았다.
이 상황에서 우산이 있을 리가 없지. 멀쩡한 건물까지 가기엔 거리가 조금 있어 급한대로 근처 나무가 무성한 공원으로 몸을 피했다. 이제는 공원이 아닌 숲이라도 된 듯 아무렇지 않게 가지를 뻗은 것들이 무성한 곳이었다. 조금이나마 비를 피하긴 충분해 보였다,
그때였다. 불안한 감은 매번 틀리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거대한 괴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바라 보기만 해도 꽤 만만치 않은 녀석임이 느껴졌다. 콧김을 뿜는 녀석의 행동에 오랜만에 긴장된 기류들이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 몸이 된 듯 휘둘려지는 진천패도가 반응하듯 바르르 떨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꽤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마지막으로 곁에 선 김독자의 표정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도 다르진 않았으나, 긴장감 보단 당혹스러움이 좀 더 짙었다. 왜? 라고 묻는 듯 괴수를 향해 던져진 시선이 느리게 흔들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가장 먼저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괴수와의 공방전이 시작됐다. 느낀 바와 같이 만만치 않은 녀석이었다. 몸집이 거대한 만큼 가죽이 두꺼워 상처를 내는 것도 어려웠다. 비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졌고, 누군가의 숨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을 때다. 바닥이 질척거리는 탓에 발을 잘못 헛딛어 몸을 잘못 날린 탓에 근처에 있는 나무 밑동을 발돋움 삼아 궤도를 트려고 했을 때였다.
“유중혁!”
익숙한 목소리가 처음 멸망이 도래했던 날과 같이 고함을 쳤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여기까지 가까워진 김독자의 몸은 시야를 가렸고, 누군가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자신을 꾹 끌어안은 김독자의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쏟아지는 여름의 차가운 비에도 불구하고 잃지않은 온기는 부드럽게 전신을 감쌌고, 그의 손은 뒤통수까지 감아 넓지 않은 어깨에 이마를 푹 기대게 만들었다.
이토록 아득한데 불안감이 커져가는 이유가 뭔지, 유중혁은 알고 싶지 않았다. 기나긴 침묵 속에서 이현성의 기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는 차마 막지 못한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들 수 없어 시야는 온통 깜깜했다. 김독자. 그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애타는 마음에 심장 박동수가 불쾌할 정도로 쿵쿵 거리기 시작했다. 손이 천천히 등을 더듬어 오르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따뜻한 것이 손바닥에 질척거렸다. 더듬더듬 올라가는 손은 잔뜩 긴장한 채였다.
“김독자, 손 떼라.”
“중혁아, 우리 이러고 잠깐 가만히 있자.”
“……김독자, 알고 있나? 이건 구원이라는 이름의 기만이다.”
“알고 있어.”
속마음을 대변하듯 덜덜 떨리는 손이 겨우 찾아낸 등의 상처를 꾹 눌러 지혈했다. 자신을 대신해 다친듯한 흔적이었다. 손아귀 가득 올라차는 핏물이 느껴졌다. 끔찍했다. 이것보다 끔찍하고 두려운 일은 없을거라고 유중혁은 감히 확신했다.
“원치않은 구원은 씻을 수 없는 저주다.”
“그것도 알고 있어.”
달래듯이 건네는 말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힘없는 손은 어느새 제 뒷머리를 느리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퍽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기만과 같게 느껴졌다. 이럴 거면 날 왜 살린거지? 대답해라, 김독자. 차마 뱉지 못한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모두 목이 메여 말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모든 것이 네 의도된 성흔이라면”
“중혁아.”
콜록. 김독자는 작은 기침을 토했다. 폐에 들어찬 핏물이 입가를 따라 느리게 흘러내렸다. 전신을 끌어안은 온기가 이젠 아무렇지 않았다. 고통에 무뎌진 것인지, 혹은 벌써 시간의 끝에 도달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고자 하는 말을 미련없이 모두 말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날 원망해도 괜찮아. 잊어도 괜찮고. 다만 이거 하나는 기억해라, 중혁아. 네 동료는 너는 ,모두 지켰다는 사실을.”
그렇게 말하는 김독자는 마치 자신은 그 ‘동료’안에 자신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듯이 굴었다. 김독자는 늘 그랬다. 처음부터 자신을 그곳에 욱여넣지 않았다. 늘 동료를 한 명씩 소개시켜주며 네 동료라고 칭했으나, 자신을 소개할 때엔 동료라는 수식어 조차 붙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적잖이 원망스러웠다. 넌 늘 이런 식이군, 김독자. 언제 쏟아졌는지 모를 눈물이 두어 방울 더 아래로 추락한다. 먹먹한 문장에 김독자는 그저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이것이 그가 결론내린 최선의 선택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모습이 못내 화가났다.
“중혁아.”
이젠 말하는 것조차 힘겨워보였다. 그런 그가 품에서 떨어져 담담히 시선을 마주했다. 또 그런 표정이었다. 교실에서 코피를 흘리고 난 후 지었던, 예상했다는 듯한 덤덤한 표정. 어차피 개연성 문제로 꽤 오래 자리를 비웠어야 했을 거야. 이만큼의 후폭풍은 있었을테고, 최대한 그들의 손을 타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만신창이가 된 몸을 한 채 하는 말들이 가관이었다. 늘어지는 무수히 많은 말들에 노려보고 있자니 김독자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러더니 작은 한숨. 너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안 들을 거지. 속삭이듯 중얼거린 김독자의 양손이 제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쿵, 이마가 부딪힌다. 속도 모르는 그가 작게 웃는 낯으로 짧게 입을 맞추곤 떨어졌다.
“우린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알지?”
비를 쏟아내던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 뒤에 숨어 있던 여름의 파란 하늘은 서서히 뿌옇게 변질되어 갔고, 매미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만 갔다. 고여있던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듯 모든 것이 바쁘게 움직였다. 주변을 감싸던 공기의 온도는 서서히 낮아졌고, 탄내가 더욱 강해졌다. 쏟아지던 비는 이젠 새하얀 눈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어느덧 겨울이었으며, 유중혁의 몸은 조금 더 커 있었다.
시나리오를 무사히 클리어했다는 반투명한 메시지 창이 떴음에도 그는 확인 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붉어진 제 연인을 품안 가득 끌어안았다. 서울, 모두가 경악찬 표정응로 바라보는 한 가운데에서 유중혁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