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날 리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사람들은 기적이라 했다.
그리고 지구는, 시나리오의 결이라는 기적을 선물 받았다.
그 아이의 태엽을 감아줘
중혁 x 독자
"그래서 반 배치 고사를 봤는데요, 아저씨. 중 3한테 배치 고사라니 웃기지도 않지 않아요?"
우리가 중 1도 아니고. 신유승이 투덜거렸다.
"다들 죽네 사네 뛰어다녔는데 그 시간 동안 공부한 미친놈이 어딨겠어요, 그쵸 독자형?"
질세라 이길영이 말을 받았다. 둘이 이렇게 죽이 잘 맞는 것도 오랜만이네. 김독자의 엷은 웃음이 얼굴 위로 번졌다. 그 끔찍한 시간들을 겪고도 어른들은 여전히 꼰대였으며, 여전히 성적으로만 줄 세우기를 하려 든다는 넋두리였다.
"그런데 그거 아니 얘들아? 일단은 나도 어른인데 말이지. 듣는 어른 서러워지게."
"아저씨는, 아저씨느은…."
김독자는 그런 어른이 아니라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아이들을 보며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학교 통틀어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길영아? 좀 많이 별난 애겠지만."
김독자의 대답에 이길영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뿐이던가. 살짝 벌어진 신유승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모른 지 오래다. 어떻게 알았냐는 뜻을, 말이 아닌 표정으로 도출해내는 둘을 바라보던 김독자가 이번엔 조금 더 짙게 웃었다.
나는 그런 셋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다 소리 없이 미닫이문을 닫았다.
99번까지 진행되던 시나리오가 결(結)을 본 지도 벌써 3개월째였다. 온 하늘을 희뿌옇게 뒤덮고 있던 멸망의 공기가 걷혔다. 현실을 이야기라는 유희의 형태로 전환시키던 도깨비들이 사라졌다. 한낱 필멸자들을 멸시하며 그들에게 고난을 주던 성좌들이 물러났다. 한때 화신이었던 인간들은 코인으로 쌓아올렸던 체력과 힘을 잃었다. 배후성들이 죄 사라졌으니 특수한 스킬을 잃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힘은 조금 약해질지언정 더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남은 인간들은 손에 무기가 아닌 도구를 쥐었다. 무너진 건물을 복구해 올리고, 마을을 재건했다. 질서 정연한 뚝딱 소리가 매일 아침을 깨웠다. 생필품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공장에 불이 지펴졌다. 공단 근처의 매캐한 공기마저 그들은 사랑스러워했다.
잃어버렸던 존재의 근엄성을 되찾고,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떠올린 이들은 험한 일을 하면서도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라도 된다는 듯 인간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들만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도, 이야기꾼인 도깨비나 혹부리도, 감히 성좌라 할지라도 넘볼 수 없는 이야기를. 멈춰있던 그들의 시간을 누군가 해방시키고 있었다.
마치, 멈추어버린 인형의 태엽을 감아 인형을 다시금 걸어가게 만들듯이.
누군가 그들의 태엽을 감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독자형."
변성기를 지나 이제는 완연히 낮아져 버린 이길영의 목소리를 배웅하는 말간 미소, 흔들리는 하이얀 손. 잔 흉터가 남은 것치고는 지나치게 고운 손이 태엽의 주인이었다.
"…다들 갔나."
그리고, 복도를 울리던 까르르 소리와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고서야 나는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와 중혁아."
그런 날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김독자는 전에 없던 함박웃음을 띠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의 일렁임이 마냥 아찔하기만 해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은 좀 어떤가. 김독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녀석에게 물었다. 뱉어지는 이 음성은 누가 들어도 낮게 잠긴 채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그것이라, 입 밖으로 말소리를 내뱉고도 스스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티끌 없이 순수하던 김독자의 웃음이 별안 일그러졌다.
"알잖아 중혁아. 이런 걸 매달아 놓는다고 나아질 몸은 아니라는 거."
김독자가 손을 흔들자 손등 위 매달려있는 링겔이 함께 너풀너풀 춤을 춘다. 그래, 아까부터 그 얇은 선이 눈에 거슬렸더랬다. 김독자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던 시선을 차츰 아래로 내렸다.
한 손에 잡힐 것 같은 얇은 모가지와, 곤색 줄무늬가 죽죽 그어진 하얀 바탕의 병원복. 한눈에 보기에도 작은 사이즈의 병원복은 그마저도 품이 넉넉하니 남아 보였다. 소매와 바지 밑단으로 드러난 앙상한 손목과 발목은 핏기라곤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보지 마. 그런 시선을 견딜 수 없다는 듯 그제야 녀석은 표정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러다 이내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마저 견디지 못하겠다는 건지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타조 같았다. 자신의 고개를 땅속에 파묻으면 상대 또한 저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어리석고도 가련한 생물체.
"안다. 그래도 매달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유일하게 마음이 놓이는 방법이었다."
한숨을 내쉬고는 잔뜩 움츠러든 타조를 쓰다듬었다.
"얼마 안 남았어. 이젠 이 병원에서도 나가야 할 거야."
"… …."
"오늘 길영이도 유승이도, 내가 3년 동안 자리를 비워야만 했던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더라. 거의 다 왔어. 이제 첫 만남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시간문제야."
달갑지 않은 이야기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 중혁아, 모두에게 잊혀지기 전에 내가 먼저 잊은척하면 안 될까? 이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 따윈 집어치우고 어딘가로 숨어버리면 안 될까? 쉴 틈 없이 말을 내뱉는 김독자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단어를 내뱉었다. 단어의 나열을 그만두면 그 틈새로 찰나의 불행이라도 깃들까 두려워하면서. 불안과 짜증의 냄새가 입원실 안을 퀘퀘하게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해줄 말을 한동안 찾지 못했다. 거칠게 링겔을 떼어내는 김독자를 도저히 말릴 수 없었다.
*
김독자는 저주받았다. 시나리오의 '결'과 뒤바꾸어 받은 <스타 스트림의 저주>.
최후의 전장. 후두부를 강타한 그날의 기억은 강렬해서 지금도 이따금씩 눈을 감으면 그날의 전장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매 밤 지옥 같은 악몽이 나를 찾아왔다. 김독자가 있는 병원까지 기어들어와, 병원의 간이침대에서 녀석의 손을 잡고 잠들어야 겨우 지워낼 수 있는 기억.
[정말 그 길을 선택할 건가요 구원의 마왕. 그 길을 가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다른 이와 이야기를 쌓을 수 없을 텐데요.]
그날, 우리 앞에 강림한 성좌는 재차 김독자에게 물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친우를 걱정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내며 '구원의 마왕'의 결정에 귀를 기울입니다!]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의 희생 의지에 눈시울을 붉힙니다!]
화신체를 빌려 강림하지 못한 성좌들은 간접 메시지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성좌들뿐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김독자 컴퍼니 일원들도 다짜고짜 김독자를 말리고 있었다. 지성을 가진 생물체들 전부가, 하나씩 갖고 있는 그 빌어먹을 입을 통해 제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모두가 '지구'의 '결'과 김독자가 받게 될 패널티에 대해 각축을 벌이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 안 된다. 김독자.
모두가 갖고 있는 그 입이라는 기관을 나는 차마 사용하지 못해서. 파열되어 버린 성대를 쓸 수가 없어서. 초라하게 한낮의 밀회를 발동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와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끔찍한 고통. 이성의 끈 끄트머리를 겨우 잡고 아이템에 의존해 의사를 전달하는 이는 더 이상 강력한 초월좌도, 추앙받던 패왕도 아니었다.
─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김독자.
그저 버러지같이 무력한 개체에 불과했다. 회귀라는 조금 특이한 성흔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한없이 착각하던.
1회차와 2회차의 자신을 넘어서고, 까마득한 41회차의 자신마저 이겨내자 묘한 자신감이 생겨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 없이 키워온 자신감은 아니었다. 수천수백의 적을 베었다. 인간도 있었으며, 인외의 존재도 여럿이었다. 무너져가는 나를 증명된 실력으로 세웠고, 종종 실력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엔 김독자의 존재를 생각하며 버텨왔다.
딱 그 정도의 존재였다 김독자는.
부재를 느끼는 순간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오는 존재. 두터운 신뢰감과 함께, 끊임없는 불안감을 선사한 모순된 존재. 나의 3회차에 이름을 준 존재. 유일唯一이라는 어휘는 필시 그가 만들어낸 어휘일 것이다. 그와의 공존을 위해 나는 수백 수천 갈래의 가능성과, 회귀라 불리는 영원을 끊어냈다.
하필 딱 그 정도의 존재였어서 김독자가….
정신을 차려보면 손아귀 한가득 김독자를 잡아채고 있는 나를 마주한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필요 이상으로 흥분한 유중혁은, 언제나 김독자의 안위와 결부되어 있었다. 회중시계를 손에 감고 별을 헤던 그날도. 김독자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자 미친 듯이 달려들던 별의 증명 시나리오도. 그리고, 김독자의 안위가 눈에 밟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면 나는 종종 일을 그르쳤다.
"선택하겠습니다. 이 길을."
그리고 그날도 그러했다. 무리하는 김독자를 차마 보지 못하겠어서 격을 과하게 개방한 것이 문제였던 건가. 함정이 있다는 것을, 지원군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멍청하게도 알아채지 못했다. 고개를 돌릴 힘은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신음하고 있었다. 분해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을 떠안은 채 바르작거려 보지만 김독자만큼 확실하게 '결'의 방향을 틀어놓을 방도가 없어 이를 꾹 다물고 발만 동동 구르고들 있었다.
나는 길게 묻지 않았다.
─ 어째서.
김독자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었다. 고장 난 장난감처럼 한 단어만을 반복해 한낮의 밀회를 보낸 것에 대해 조금은 놀란 눈치였지만 별을 담은 눈동자에 흔들림이나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 네가 가려고 했던 길이니까. 그 길을 내가 가는 게 당연하잖아, 중혁아.
아주 잠시,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정신을 놓지 않고 버티는 것도 슬슬 한계인가 싶었다.
─ 처음에는 원하는 결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였던가. 중혁이 네가 보고 싶은 결이라면 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그걸 위해 내가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한낮의 밀회도, 말소리도 아닌 생각으로 답했다. 너라면 충분히 읽어가겠지. 그리고는 물었다. 스타 스트림의 저주, 정확히 어떤 저주인지는 알고 있는 건가.
─ 알고 있지. 타인과 지금까지 쌓아온 이야기와 관계들을 내 힘으로 유지할 수 없어. 사막의 모래처럼 흩어지는 거야. 관계가 얕아지고 기억이 희미해지고. 언젠간 그들에게서 나라는 존재는 잊히겠지. 앞으로 새로 쌓여지는 관계들 또한 마찬가지. 무얼 해도 인상에 좀처럼 남기 힘들겠지. 있는 듯 없는 사람. 물과 기름이 영원히 섞일 수 없듯, 주위를 빙빙 떠돌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될 거야.
김독자. 생각으로 녀석을 불렀다.
─ 괜찮아. 지금까지랑 큰 변화는 없을 거야. 모두 나 보고 그랬잖아. 인상이 희미하다고, 가장 못 생긴 왕이라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김독자는 나를 얕보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나 도깨비들은 전부 '이야기'에 미친 자들이었다. 때문에 진명을 부르는 것보단 꾸밈말이 잔뜩 들어간 수식언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는 누군가를 저주할 때에도 동일했다.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며 이후로도 사람을 사귈 수 없는, 영원한 고독의 형벌을 이 세계는 '이야기를 쌓을 수 없는 저주'라고 에둘러 말했다. 덕분에 이 저주의 내용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추측하는 이는 드물었다. 아마 저기 있는 이길영도 신유승, 어쩌면 정희원이나 이현성까지도 저주를 백 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겠지.
김독자는 나 또한 저주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어떻게든 무마해보려 하는 거다. 가장 못 생긴 왕을 입에 담으며 짓는 그 허여멀건 미소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데.
동료 중 인상이 희미한 사람으로 남는 것과, 어떤 작당을 해도 동료조차 될 수 없는 것은 확연히 다른 일이었다.
─ 김독자, 네 녀석… ….
─ 그러니 앞으로의 나도, 부디 잘 부탁해 중혁아. 이 이야기도 전부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순간이었다. 눈이 시렸다. 아주 많이. 그리고 다시 한차례 시야가 번졌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시야가 흐려지던 까닭은, 정신을 잃기 직전이라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
"새 링겔을 갖고 오겠다."
똑, 마지막 한 방울의 액체가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곤 가차 없이 자리를 떴다. 보나 마나 김독자는 그럴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저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기에 호출 벨이 있지만 부러 몸을 움직였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어서 간호사는 내 손짓만 보고도 무엇이 필요한지 곧장 알아차렸다.
간호사가 떠난 자리에는 그녀 대신 내가 앉았다. 주저앉았다.
김독자의 곁을 자처했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김독자에게서 멀리 떨어질 장소가 필요해졌다. 한탄 섞인 긴 숨을 내뱉을 공터가 없었더라면 나약해빠진 정신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져 다시는 기어올라올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확실히 이 짓은, 생각보다도 더 정신을 깎아먹는 짓이다.
김독자에게 필요한 것이 일반 링겔일 리 없었다. 애당초 설화 팩이 아닌 도구를 들고 녀석의 회복을 바라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시나리오의 결을 본 세계에서, 설화 팩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일이 이렇게 될까 봐 그날 발작에 가까운 행위까지 해가면서 김독자를 막으려 했건만.
어떤 저주는, 같은 저주라도 저주를 받는 대상에 따라 치명상을 입히느냐 적당한 패널티에서 그치느냐가 갈렸다. 그리고 성좌인 김독자에게 '이야기를 쌓을 수 없는 저주'는 목숨마저도 위협할 수 있는 최악의 상성을 지닌 저주였다. 인간의 몸을 간직하고 있는 화신들이나 초월좌들이야 조금 외로워지는 것 정도로 견딜 수 있겠지. 저주야 살아남아 평생을 간다지만 시나리오의 끝을 이미 본 세계에서 그들의 몸은 다시금 피와 살의 구성으로 돌아갈 테니.
하지만 성좌는 달랐다. 이야기로 연명하는 자.
이야기가 곧 목숨인 자가 그 전부를 잃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내가 그 저주를 받아야 했다.
결을 보기까지 김독자는 수천 번도 더 성좌를 증오했고 그들을 말살하고 싶어 했으나 본질적으론 녀석도 그들과 다를 수 없었다. 이야기를 잃어가는 그의 안색은 여느 병원 중환자의 것마냥 파리하고 초라했으며, 오랫동안 그 얼굴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찌르듯 아파졌다.
"유중혁씨가 왜 그렇게까지 저 환자분을 챙기는지 난 잘 모르겠어."
고요한 밤의 병원, 어디선가 얇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게 말이야. 다른 분들은 TV에도 종종 나오시고 인터뷰도 많이 하시던데, 유중혁씨는 그런 거 하는 모습 한 번도 못 보지 않았어?"
소리를 따라가 보니 한적한 휴게실이 근원이었다.
"더 이상 그 끔찍한 시나리오를 이어나가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준 공신인데, 난 유중혁씨가 좀 더 편하고 안락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그러셔도 되는 분이잖아."
"그치. 그런데 여기서 이러시고 계시는 걸 보면 저 환자분이 뭐 엄청 대단한 분이라도 되셨나 봐. 유중혁씨한테는."
기척을 죽이고 벽에 기대었다. 나는 어느새 그들에게 시나리오의 종결을 불러온 구세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종결자, 패왕 유중혁. 나뿐만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대부분의 김독자 컴퍼니 일원들은 전부 영웅으로 떠받들어져 사회적 지위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아마 별다른 직업을 갖지 않은 채 TV에 종종 얼굴 정도만 비추어 줘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는데 지장이 없으리라.
단 한 명, 김독자만을 제외하고.
"그러고 보니, 그 환자분 이름이 뭐였더라?"
"김간 방금 링겔 갈아주고 오지 않았어? 근데 벌써 이름을 또 까먹었단 말이야?"
내 요청으로 링겔을 갈아주고 온 간호사가, 그렇게 건망증이 심해서 일은 어떻게 하겠냐며 동료 간호사들에게 타박을 받고 있었다. 장난이 반, 진심이 또 반. 그렇게 한참을 시시덕거리던 그녀들은 그러나, 머지않아 알아챘다. 자신들 중 그의 이름을 온전히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음을.
"이상해. 그렇게 어려운 이름이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유독 안 외워진단 말야."
머릿속에 입력하면 누가 지우개를 들고 와 다시 지워버리는 것도 아니고. 이어지는 착잡한 듯한 말에 주르륵, 기대 있던 벽에서 흘러내렸다.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가 김독자의 이름을 잊어버린 작금, 그가 이 병원에 여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 권유와 자금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이 병원을 나가야 할까?"
그 사연을 알 리 없는 김독자는 매일을 두려워했다.
"아니면 모레이려나."
오늘 오전, 창밖을 내다보며 날짜를 세는 듯한 그 모습이 괘씸했던 나는 탁상 위의 달력을 치워버렸다. 그러자 조용히 날 올려다보던 김독자가 천천히 그 말랑한 입술을 벌려냈었다.
"중혁아 「마지막 잎새」라는 소설, 알아?"
"… 알아도 왠지 대답해주고 싶진 않군."
퉁명스러운 대답에 김독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곤 나긋하게 중얼거렸다. 중혁아 책 좀 읽어. 책 읽는 것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댔는데 넌 어쩜 그러냐. 저 녀석을 죽일까 몇 번이고 진지하게 생각을 가다듬는데 어딘가 쓸쓸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존시라는 가난한 예술가가 폐렴에 걸려 누워 있었대. 희망이 없는 존시는 창밖만 바라보며 떨어져가는 잎새를 봤어. 저 이파리들이 다 떨어져 버리면 나도 죽겠지, 존시는 생각했어. 보다 못한 동료 예술가 수가 베어만이라는 아래층 영감을 찾아가 존시의 이야기를 했대."
"그러자 존시의 어리석음을 지탄하던 베어만 영감은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데도 불구하고 지붕에 담쟁이넝쿨 이파리를 그리다 폐렴으로 죽는다. 평생 걸작이라곤 한 작품도 그려보지 못하고, 쥐꼬리만큼 번 돈은 술을 사는 데에 전부 바친 주제에. 정말 멍청한 영감이지 않나."
노화가 베어만의 이야기를 하다 그만 입안이 써 미간을 찌푸렸다.
행복이라곤 마음껏 누려보지도 못하고 언제나 결핍된 시궁창 안에서 살아오다 인생의 마지막마저 타인의 삶을 위해 희생해버리다니. 그 이야길 알고 있었어? 같은 말이나 띄엄띄엄 이어내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는 저 녀석이야말로 누구보다 완벽한 '베어만'이 아니던가.
"중혁아. 나를 위해 담쟁이넝쿨 이파리를 그려줄 거니, 넌?"
김독자가 나에게 묻고 있었다. 멈춰버린 내 시간과 내 세계의 태엽을 감아주겠니.
멈춰버린 이들의 부활을 위해 태엽을 감던 이는, 남의 태엽을 감다 그만 자신의 태엽이 멈춰 버렸다. 비바람도 무섭지 않던 용감한 베어만 영감은, 어느새 침대에 누워 죽음만을 세어보는 바보 같은 존시가 되어버렸다.
"김독자, 나는 …."
"그려주면 안 돼. 너는."
입을 떼기가 무섭게 김독자가 말을 가로챘다. 단호해진 목소리에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엉망이 된 몸과는 달리 각오라도 품은 양 그의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나를 얼만큼 기억하지, 유중혁?"
"네 생각보다 훨씬 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김독자."
김독자는 내게 기대고, 최후까지 함께 있어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마지막 잎새를 들먹인 게 아니었다.
"말로는 꾸며내기 쉽지. 기억이 사라져 감에도 기억하고 있다는 거짓말은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마지막 모습을 내게 보이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냉정하다 못해 표독스럽기까지 한 그 위악은 흡사 헤어지기 전 억지로 정을 떼어내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질 않아서.
"잊었나, 김독자. 생과 사를 함께한 동료.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네가 정을 떼길 원한다면, 철저히 거절해 주마.
"빠르냐 느리냐의 차이 정도야. 봐, 함께 거대 설화를 쌓았음에도 얼마나 쉽게 그 이야기가 무너지는지. 더 이상 신유승도, 이길영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 나는. 언젠간 너도 날 보고 누구였냐고 물을 걸?"
"김독자."
"아 물론, 그것도 네가 이 병원까지는 어찌어찌 찾아왔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고. 중혁아, 기억을 잃은 너가 나를 찾을 수나 있을까?"
다만 나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호랑이는 이빨이 빠져도 호랑이듯이, 김독자는 이야기의 결핍을 앓아도 김독자라는 사실을. 세치 혀로 수많은 성좌들을 홀렸던 김독자였다. 성좌들의 흥미를 돋우고, 때론 도발하였으며, 얄밉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던 김독자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리고 녀석이 나를 일부러 도발하고 있단 걸 알면서도 부아가 치미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기억한다."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낮은 목소리로 그를 을렀다.
"저 스스로를 예언자라고 소개하며 동료를 자처하던 미치광이 같던 첫 만남의 네 녀석도. 내가 가질 마왕의 자리마저 빼앗아 허망하게 사라지던 네 녀석도. 웬 동떨어진 구역에서 내 행세를 하며 이름을 팔던 네 녀석도. 이계의 신격에 홀로 대항한답시고 3년씩이나 자리를 비우던 네 녀석도…!"
짓씹듯 내뱉던 목소리가 조금씩 격양되었다.
"크고 작은 일들, 네 시시껄렁한 버릇까지 늘어놓아야 받아들일 속셈인가."
점점 데시벨을 높여가던 목소리를 겨우 가라앉히고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패기 좋게 나를 도발하던 낯짝은 어디 간 건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독자는 목을 길게 뺀 겁쟁이 타조가 되어 있었다.
"이지혜도, 이현성도. 유상아도 한수영도. 그리고, 신유승과 이길영까지도. 삶을 나누던 동료들이 죄다 너를 잊었는데 나 혼자 너를 기억하고 있는 게 못내 두렵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나."
정곡을 찔린 건지 그는 말이 없었다.
"그 녀석들과 난, 이야기가 쌓여온 세월 면에서 비교할 계제가 못 될 텐데."
전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김독자.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던 시선들을. 때론 따스함으로, 때론 기대감으로, 때론 동경으로 시시각각 변해가던 그 시선들을 나는 잊을 생각이 없다. 무엇 하나 외면하지 않을 테다.
"이야기를 쌓을 수 없는 너라고 해도, 나는 너와 이야기를 쌓고 싶다. 김독자."
그는 뒤늦게서야 품에 기대어 왔다. 가면을 벗어낸 그는, 떨고 있었다.
*
"그럼 당직실에서 좀 자고 올게."
휴게실 안에서 걸어 나오는 기척이 나자 몸을 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독자의 이름과 존재를 잊어가는 그네들의 이야기가 발단이 되어, 잠시간 감상에 젖었다. 오전에 있었던 김독자와의 다툼에 관자놀이까지 지근지근 아파지는 기분에 옆 이마를 꾹꾹 눌러댔다.
쓸데없는 청승 떨지 마라며 듣는 이들의 귀가 닳도록 얘길 해댄 건 언제나 나였는데. 어느새 청승을 떨고 있는 이 또한 저 자신이 되었다.
"그러니 내가 쓸데없는 청승을 떨지 않도록 네가 좀 잘 해라. 김독자."
허공에 대상 없는 넋두리를 내뱉고 병실 문을 열었는데, 시야 안에 찾는 이가 없었다.
"김독자?"
빠른 시선으로 방 안을 훑었다. 마구잡이로 열려 있는 병실 안 옷장, 걷어차인 듯 뒤엉켜 있는 이불. 엉망으로 뽑혀져 나뒹굴고 있는 링겔과 도둑이라도 들었던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흐트러져 있는 바닥. 난장판이 된 공간 안에 김독자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혁아, 나 무섭다.
아까 전 그 떨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불안감이 엄습해 바삐 외투를 걸쳤다. 휴대폰을 잡아들고 병실 문을 나섰다. 실종 신고를 할까, 충동적으로 112까지 눌렀다가 이내 화면을 꺼 버렸다. 경찰이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제발 멀리 가지만 말아라. 김독자."
달음박질로 병원 계단을 내려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통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다.
오전에 나를 떼어놓으려 위악을 부리던 김독자는 가면을 벗고서야 속내를 드러냈었다.
"나 무서워 중혁아."
품에 안겨 토닥임을 받는 내내 그는 무섭다는 말만을 반복하였다. 그러다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요즘 사람이 그냥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냐는 되물음에도 그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부스럭거리며 자세만 조금 틀었을 뿐. 그가 자세를 바꾸자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속눈썹 대신 말랑한 입술이 닿아왔다. 그리고 그 체온은, 감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얼음장 같았다.
"사람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보여. 시나리오가 진행되던 시절의 화신들이 그랬듯이. 이젠 시나리오고 화신이고 전부 사라졌는데. 이야기의 집합체가 아니라 피와 살로 구성된 사람의 육체일 텐데. 웃기지?"
"… …."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아먹고 살듯이, 성좌들은 이야기를 먹고살잖아. 너도 기억하겠지. 그토록 증오했던 미식협. 스스로 성좌가 되면서도 저런 악종들은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잃고 육체마저 분해되어 사라질 상황에 처하니까 본능이 갈증이 되어버린 거야."
차디찬 입술이 내 어깨를 머금었다. 딱딱한 윗니와 아랫니가 살갗에 닿아옴과 동시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스쳤다.
"중혁아. 내가 널 물어뜯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너는, 정말 사랑스럽다 못해 맛있기까지 한 이야기인데. 그가 말을 맺음과 동시에 맞닿았던 이빨도, 입술도. 천천히 어깨에서 떨어졌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까지 스륵 풀어낸 후에야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을 장악한 감정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을 혐오하다 못해 목 졸라 죽이고 싶어 하는 살의에 가득 찬 얼굴. 거기에 김독자의 바닥이 있었다. 저 맨얼굴을 나에게 드러내기 위해 녀석은 매일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부림쳤겠지.
코인으로 증량된 체력과 힘은 사라졌어도 몸만은 수만 번에 달하던 그 민첩한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는지, 한달음에 병원 건물을 벗어났다. 건물에서 나오고서야 나는 계절과 맞닥뜨렸다. 겨울이 내리고 있었다. 새하얗게 쌓여 밟을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는 눈.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그 하얀 눈덩이가 그를 찾는 시야를 방해했다.
막연히 추울 것이라는 생각은 하였지만, 예상 이상으로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초라한 인간을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리를 바삐 가누면서도 손으론 연신 겉옷을 여미어냈다.
병실에 누워 죽을 날만 세던 것은 김독자 뿐만이 아니었다. 모르는 사이 내 시간과 계절마저도 혹자의 말마따나 그곳에 고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독자!"
골목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희뿌연 입김이 나옴과 동시에 폐까지 시린 기운이 훌쩍 들어섰다.
"김독자! 어디 있나! 대답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손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장이 하나하나 꼬여가는 듯한 고통과 압박감이 숨통을 조여왔다.
"왜 가버린 거냐, 김독자! 어디로 가 버린 거냐!"
병원 근처의 골목이란 골목은 전부 돌았다. 겨우 성인 남성 하나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은 외진 길까지. 그럼에도 익숙한 그 동그란 뒤통수도, 늘상 입고 있어 이제는 일상복 같아져 버린 하이얀 병원복도. 그토록 내가 좋아했던 멍청한 웃음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속절없이 내리는 함박눈에 참았던 설움이 툭 튀어나왔다.
"너는 무섭다고 했다. 초라한 바닥을 보여 버렸지만 곁에 있어달라고 했다. 기댈 곳을 찾는다고 했다."
닿지 못할 말들을 쏟아부었다.
"내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네 기댈 곳이. 최후의 최후까지 잠들 요람이. 그런데 어째서…."
역시 못 미더웠던 것인가. 거침없이 내뿜어지던 속상함도, 억울함도, 결국 나 스스로를 겨냥하는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언제나 두려웠다. 네게 못 미더운 존재가 되어 홀로 남겨지는 것이. 그 두려움이 내 발목을 묶는 사슬이 되어 내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너를 버릴 순 없었다.
"김독자!"
시커멓게 그을린 심장을 쥐어짜내며 그 이름을 외쳤다. 남은 힘을 다해 뜀박질을 했다. 어느새 대로변이었다. 모두가 잠든 도시는 잠잠했다. 불이 켜진 가게 하나, 도로 위를 달리는 승용차 하나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백여 개에 가까운 시나리오를 거치며 인간들의 가치관은 부와 명예를 쌓아올리는 것보다는 생존, 제 목숨 하나 건사하는 것에 더 중심을 두기 시작했으니. 정신이 거꾸로 박힌 인간이 아니고서야 이 시간대에 보금자리 밖으로 나오는 이는 없었다.
띄엄띄엄 서 있는 신호등이 쏘아보내는 색색깔의 빛과, 간혹가다 만날 수 있는 가로등이 내뿜는 노오란 빛에 의존해 김독자를 찾는다.
"김독자! 손에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가끔 슬픔을 뚫고 올라오는 분노가 대로변을 울렸다.
알고 있었다. 더 이상 김독자는 정상적인 방법으론 존재할 수 없음을. 그의 이름 석 자가 이미 하나의 병증이 되어가고 있었다. 설화 없는 세계의 설화 미식가. 그 어떤 약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병을 떠안은 채 고독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운명에 씌인 자.
사라진 그를 찾는 건 단순히 개인적인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일 결핍과 갈증으로 눈이 멀어버린 김독자가 이대로 떠돌다 민간인을 마주치게 된다면…. 틀림없이 치명적인 재해였다.
"김독자?"
한참을 어슬렁거렸을까. 어둠 속에서 기묘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인영人影은 허리춤까지 그림자가 져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가만히 인영의 걸음걸이를 눈으로 좇았다. 대로 건너편에 있던 인영이, 파란 불이 켜진 것도 아닌데 거대한 8차선 도로를 주춤주춤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사방에서 파란 불이 켜지며 그 초록 불빛이 인영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 …!"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한 몸 던지다시피 달려갈 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달리다 한 번은 몸에 힘이 쭉 빠져 그대로 주저앉았다. 꽁꽁 언 도로 바닥에 바지가 쓸리고, 무릎이 따끔따끔 아파왔지만 일어나서 마저 달렸다.
"김독자!"
그곳에 그가 있었기에.
그의 반 쪽 얼굴은 초록 불빛이, 또 다른 반 쪽 얼굴은 붉은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머리며 어깨에 닿는 눈은 체온으로 인해 녹을 법도 하건만. 범인凡人의 체온보다 훨씬 낮은 체온 때문인지 가만히 쌓여만 있는 눈이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제대로 걸친 겉옷 하나 없이 얇은 병원복에 맨발로 나온 녀석의 기행에 나는 탄식했다.
"아무리 급해도 옷 정도는 제대로 챙겨 입고 나왔어야 했다…. 아."
그에게 입고 온 겉옷을 둘러주다 마주한 눈동자에 말을 잃어버렸다.
오롯한 식욕만이 텅 빈 동공을 채우고 있었다.
김독자는, 내게서 도망치기 위해 눈길을 달려 나온 것이 아니다.
그 명백한 명제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한 편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 이제는 결정해야 했다. 칼을 뽑아들 수 있는 것은 지금뿐. 이성을 되찾은 이후의 김독자가 얼마나 깊은 자괴감의 수렁에 빠질지는 불을 보듯 뻔해서.
확실히, 그가 더 이상 엇나가지 않도록 여기에서 그의 명을 끊어주는 것 또한 그를 향한 애정의 한 가지 발로이리라. 그러나,
"나를 먹어라, 김독자."
나는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 근처에 목덜미를 들이밀었다. 차가운 입술이 츕츕대며 목덜미를 머금다 이내 송곳니를 콱 박아 넣는다. 작은 어금니로 잘근거리자 살갗을 따라 선혈이 흐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새벽녘, 8차선 도로의 한복판에서 신호마저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흡혈 행위라니. 이 무슨 우스꽝스러운 광경인가.
원한다면 김독자가 언급했던 소설 속의 노화가가 되어 모든 걸 내어주기라도 할 셈이었는데, 행위의 대상이 나였기 때문이었나.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발작적으로 내 이름을 불러댔다. 욕을 했다. 울먹거렸다. 허공에 대고 구역질을 했다. 씹어 삼킨 것도 얼마 없는 주제에 기어이 속을 다 게워내고서야 김독자는 눈물과 핏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돌아가자. 김독자."
조금 어지러운 머리를 바로 하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주 오랫동안, 지옥 같은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악몽은 앞으로도 한동안, 그리고 아주 오래…. 나를 괴롭힐 것이다.
아아, 나의 악몽이 손을 잡는구나.
우리는 일렁이는 눈보라 속을 하염없이 걸었다.
하나는 병에 걸린 이었으며, 하나는 병에 걸리게 한 이였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내가 저주를 받지 않게 하고자 김독자 그 자신이 저주를 향해 뛰어들었음에도, 저주와 죄업의 흔적은 종국에 내 몸을 뒤덮는다. 둘은 곧 하나가 되어, 난치라 불리는 병을 나누어 짊어진다.
어떠한 ■■은, 병증의 형태를 띠리니,
"사랑한다. 김독자."
닫힌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의 태엽을 감아주는 존재가 되겠지.
그에게 몸을 의지하고는 눈을 감았다.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피가 하얀 순수를 물들이고 있었다.
치명적이더라도 내게만 머물기 바라는 난치의 기억
내게서 자라나다 내 안에서 죽어야 하는 너라는 병
― 윤의섭作, <감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