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tence Addiction






 독자는 종종 꿈을 꾸었다.


 첫 꿈은 지하철에서 시작했다. 창 너머로 어둑해진 하늘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다음으로는 들어찬 사람들의 목소리와 지하철이 달리며 오는 진동. 독자는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낸 독자는 하얗게 찍힌 6시 57분을 보았다. 분명했다. 이건 그 날이다. 독자는 다급한 마음으로 소설 연재 사이트에 접속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휴대폰이 이상했다. 독자가 쓰는 것과 다른 기종이었다. 시간을 봐야겠다는 마음이 급해서 본인 것이 아닌 줄도 몰랐다. 당황한 독자는 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옷도 처음 보는 옷이었고 그걸 훑는 자신의 손조차도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눈높이도 어쩐지 평소보다 높은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김독자는 알았다.


 스킬이 발동됐구나.


 독자는 얼른 창에 제 모습을 비춰보았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예상대로 유중혁이었다. 그런데 왜? 확인 뒤로 당연한 의문이 따라붙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이제 막 회귀를 한 유중혁의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왜지? 지금 우린 훨씬 지난 시나리오들을 깨고 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사태에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울렸다.


 "김독자."


 그 부름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장소는 공단의 본인 침실이었다.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독자가 그나마 가장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독자는 어느 것이 현실인지 순간 구분이 안 되어 본인의 볼을 쳤다가 비유가 깨어나 머리 위로 물음표를 백 개 띄우는 모습을 보고 아까 그것은 꿈이 맞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이상한 꿈을 다 꾸네.


 비유를 끌어안고 눈을 감으며 독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단순한' 꿈이라고.


 맨날 나는 유중혁이다하고 외치다가 이렇게 됐나 봐. 아마 중혁이 들었다면 인상을 썼을 결론을 내리면서 독자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 꿈은 약수역이었다.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상황부터 마주한 독자는 당황스러웠지만, 또 꿈을 꾸는 구나 하는 자각이 들어 나름 중혁처럼 말과 행동을 했다. 


 "김독자."


 또 낮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잠에서 깨어났다.


 그다음 꿈은 이현성이 나왔다. 현성은 중혁 앞에서 혹독하게 훈련 중이었다. 아직 덜 다져진 모습이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중혁 씨, 이렇게 하면 될까요? 그렇게 묻는 얼굴은 지쳐 보이지만 의지가 가득했다. 독자는 웃었고, 또 중혁의 목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이런 꿈이 아주 여러 번 이어졌다. 장소 대부분은 독자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딘지 알 곳들이었으며, 꿈이 진행될수록 같이 있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리고 내용은 독자가 아는 전개와는 달랐다. 처음엔 띄엄띄엄 보니까 잘 알지 못했는데 분명 멸살법에서 중혁이 얻지 못했던 설화를 얻는 것을 본 뒤부터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건 독자가 모르는 전개였다. 


 이게 뭐지?


 독자는 왜 이런 꿈을 꾸게 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tls123이 제게 보내는 영상 수정본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까지 했다. 제대로 된 답은 내리지 못한 채로 꿈은 계속해서 독자를 찾아왔다. 


 꿈은 매 순간을 보여주지는 않고 스킵을 누른 것처럼 시간을 건너뛰어 아주 짧은 단면들만을 보여주고 갔다. 다행인 점은 항상 좋은 상황들이었던 것뿐이었다. 물론 시나리오를 겪는 이 상황이 좋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이 꿈의 결말을 보고 싶어. 


 꿈은 날이 갈수록 독자가 모르는 이야기만 했다. 그래서 꿈의 이유를 찾던 독자는 어느새 새로운 멸살법의 이야기를 읽는 기분으로 그 꿈들을 감상하게 됐다. 




 독자는 절벽에 서 있었다. 발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너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아주 옅은 안개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르려는 것이 보였다.


 "제자야."


 그 말에 뒤를 돌자 지친 모습의 파천검성이 곰방대를 문 채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독자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알았다. 파천검성이 제자라고 부르는 이는 독자가 알고 있는 단 하나니까.


 파천검성의 뒤로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여태껏 중혁이 되는 독자의 꿈에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다치고 엉망인 모습이었지만 아주 기뻐하고 감격하고 있었다.

중혁의 몸을 한 독자가 상황파악을 위해 눈썹을 찡그렸다.


 "해방이야!!"


 그 목소리는 독자에게 아주 큰 힌트를 주었다.


 에필로그인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독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든 검이 무겁게 떨어졌다.


 독자가 다시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완전히 뜨지도 않았는데 눈이 부신 것 같았다. 독자는 멍하니 망막을 하얗게 만드는 그 햇빛에 넋을 놓았다.

이게 이 꿈의 결말이었다. 꿈이지만, 유중혁이 맞는 결말이라니.


 "김독자."


 또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독자는 정신을 차렸다. 이제 꿈이 깰 것이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깜빡.


 하지만 눈을 아무리 감았다가 떠도 여전히 절벽이었다.


 "이제."


 또 깜빡.


 속눈썹을 떨고 있는 독자에게 이름 외에 다른 말이 들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시간에 만나자."


 다시 눈을 깜빡이자 이번엔 현실의 여명이었다.


 헉소리와 함께 상체를 일으킨 독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젯밤 잠들었던 베이스캠프였다. 바로 옆에는 길영이 모자를 구겨 베고 자고 있었다.


 "깼나?"


 그리고 다른 쪽에 앉아있던 중혁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앞엔 임시로 붙인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독자는 멍하니 불그림자가 지는 그 잘난 얼굴을 보다가 이내 입술을 꾸욱 물었다. 이제야 알았다. 꿈속의 중혁이 제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꿈속의 중혁은 자기가 모르는 1864회차의 유중혁이고 자신이 새로 써내려가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던 거였다. 독자가 여태까지의 자신을 읽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 시간 선의 유중혁만이 보낼 수 있는 한낮의 밀회, 자신의 곁에 있으려던 최초이자 최후의 독자에게 주는 작가의 특별한 자비. 


 제시간에 만나자.


 그건 먼저 미래로 나아간 중혁이 자신을 기다리겠다는 뜻 같았다. 독자가 이곳에서 해야 할 건 그 미래로 나갈 수 있는 이 주인공을 데리고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끝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독자가 그 흉터가 없는 중혁의 뺨에 손을 댔다. 중혁은 독자의 행동이 뜬금없는 듯했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독자가 피시식 웃었다.












 일어날 리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사람들은 기적이라 했다.


 그리고 지구는, 시나리오의 결이라는 기적을 선물 받았다.




그 아이의 태엽을 감아줘

중혁 x 독자




 "그래서 반 배치 고사를 봤는데요, 아저씨. 중 3한테 배치 고사라니 웃기지도 않지 않아요?"


 우리가 중 1도 아니고. 신유승이 투덜거렸다.


 "다들 죽네 사네 뛰어다녔는데 그 시간 동안 공부한 미친놈이 어딨겠어요, 그쵸 독자형?"


 질세라 이길영이 말을 받았다. 둘이 이렇게 죽이 잘 맞는 것도 오랜만이네. 김독자의 엷은 웃음이 얼굴 위로 번졌다. 그 끔찍한 시간들을 겪고도 어른들은 여전히 꼰대였으며, 여전히 성적으로만 줄 세우기를 하려 든다는 넋두리였다. 


 "그런데 그거 아니 얘들아? 일단은 나도 어른인데 말이지. 듣는 어른 서러워지게."

 "아저씨는, 아저씨느은…."


 김독자는 그런 어른이 아니라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아이들을 보며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학교 통틀어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길영아? 좀 많이 별난 애겠지만."


 김독자의 대답에 이길영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뿐이던가. 살짝 벌어진 신유승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모른 지 오래다. 어떻게 알았냐는 뜻을, 말이 아닌 표정으로 도출해내는 둘을 바라보던 김독자가 이번엔 조금 더 짙게 웃었다.


 나는 그런 셋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다 소리 없이 미닫이문을 닫았다.





 99번까지 진행되던 시나리오가 결(結)을 본 지도 벌써 3개월째였다. 온 하늘을 희뿌옇게 뒤덮고 있던 멸망의 공기가 걷혔다. 현실을 이야기라는 유희의 형태로 전환시키던 도깨비들이 사라졌다. 한낱 필멸자들을 멸시하며 그들에게 고난을 주던 성좌들이 물러났다. 한때 화신이었던 인간들은 코인으로 쌓아올렸던 체력과 힘을 잃었다. 배후성들이 죄 사라졌으니 특수한 스킬을 잃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힘은 조금 약해질지언정 더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남은 인간들은 손에 무기가 아닌 도구를 쥐었다. 무너진 건물을 복구해 올리고, 마을을 재건했다. 질서 정연한 뚝딱 소리가 매일 아침을 깨웠다. 생필품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공장에 불이 지펴졌다. 공단 근처의 매캐한 공기마저 그들은 사랑스러워했다.


 잃어버렸던 존재의 근엄성을 되찾고,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떠올린 이들은 험한 일을 하면서도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라도 된다는 듯 인간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들만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도, 이야기꾼인 도깨비나 혹부리도, 감히 성좌라 할지라도 넘볼 수 없는 이야기를. 멈춰있던 그들의 시간을 누군가 해방시키고 있었다.


 마치, 멈추어버린 인형의 태엽을 감아 인형을 다시금 걸어가게 만들듯이. 


 누군가 그들의 태엽을 감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독자형."


 변성기를 지나 이제는 완연히 낮아져 버린 이길영의 목소리를 배웅하는 말간 미소, 흔들리는 하이얀 손. 잔 흉터가 남은 것치고는 지나치게 고운 손이 태엽의 주인이었다.


 "…다들 갔나."


 그리고, 복도를 울리던 까르르 소리와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고서야 나는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와 중혁아."


 그런 날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김독자는 전에 없던 함박웃음을 띠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의 일렁임이 마냥 아찔하기만 해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은 좀 어떤가. 김독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녀석에게 물었다. 뱉어지는 이 음성은 누가 들어도 낮게 잠긴 채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그것이라, 입 밖으로 말소리를 내뱉고도 스스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티끌 없이 순수하던 김독자의 웃음이 별안 일그러졌다.


 "알잖아 중혁아. 이런 걸 매달아 놓는다고 나아질 몸은 아니라는 거."


 김독자가 손을 흔들자 손등 위 매달려있는 링겔이 함께 너풀너풀 춤을 춘다. 그래, 아까부터 그 얇은 선이 눈에 거슬렸더랬다. 김독자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던 시선을 차츰 아래로 내렸다. 


 한 손에 잡힐 것 같은 얇은 모가지와, 곤색 줄무늬가 죽죽 그어진 하얀 바탕의 병원복. 한눈에 보기에도 작은 사이즈의 병원복은 그마저도 품이 넉넉하니 남아 보였다. 소매와 바지 밑단으로 드러난 앙상한 손목과 발목은 핏기라곤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보지 마. 그런 시선을 견딜 수 없다는 듯 그제야 녀석은 표정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러다 이내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마저 견디지 못하겠다는 건지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타조 같았다. 자신의 고개를 땅속에 파묻으면 상대 또한 저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어리석고도 가련한 생물체.


 "안다. 그래도 매달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유일하게 마음이 놓이는 방법이었다."


 한숨을 내쉬고는 잔뜩 움츠러든 타조를 쓰다듬었다. 


 "얼마 안 남았어. 이젠 이 병원에서도 나가야 할 거야."

 "… …."

 "오늘 길영이도 유승이도, 내가 3년 동안 자리를 비워야만 했던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더라. 거의 다 왔어. 이제 첫 만남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시간문제야."


 달갑지 않은 이야기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 중혁아, 모두에게 잊혀지기 전에 내가 먼저 잊은척하면 안 될까? 이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 따윈 집어치우고 어딘가로 숨어버리면 안 될까? 쉴 틈 없이 말을 내뱉는 김독자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단어를 내뱉었다. 단어의 나열을 그만두면 그 틈새로 찰나의 불행이라도 깃들까 두려워하면서. 불안과 짜증의 냄새가 입원실 안을 퀘퀘하게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해줄 말을 한동안 찾지 못했다. 거칠게 링겔을 떼어내는 김독자를 도저히 말릴 수 없었다.



*



 김독자는 저주받았다. 시나리오의 '결'과 뒤바꾸어 받은 <스타 스트림의 저주>. 


 최후의 전장. 후두부를 강타한 그날의 기억은 강렬해서 지금도 이따금씩 눈을 감으면 그날의 전장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매 밤 지옥 같은 악몽이 나를 찾아왔다. 김독자가 있는 병원까지 기어들어와, 병원의 간이침대에서 녀석의 손을 잡고 잠들어야 겨우 지워낼 수 있는 기억.


 [정말 그 길을 선택할 건가요 구원의 마왕. 그 길을 가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다른 이와 이야기를 쌓을 수 없을 텐데요.]


 그날, 우리 앞에 강림한 성좌는 재차 김독자에게 물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친우를 걱정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내며 '구원의 마왕'의 결정에 귀를 기울입니다!]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의 희생 의지에 눈시울을 붉힙니다!]


 화신체를 빌려 강림하지 못한 성좌들은 간접 메시지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성좌들뿐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김독자 컴퍼니 일원들도 다짜고짜 김독자를 말리고 있었다. 지성을 가진 생물체들 전부가, 하나씩 갖고 있는 그 빌어먹을 입을 통해 제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모두가 '지구'의 '결'과 김독자가 받게 될 패널티에 대해 각축을 벌이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 안 된다. 김독자.


 모두가 갖고 있는 그 입이라는 기관을 나는 차마 사용하지 못해서. 파열되어 버린 성대를 쓸 수가 없어서. 초라하게 한낮의 밀회를 발동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와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끔찍한 고통. 이성의 끈 끄트머리를 겨우 잡고 아이템에 의존해 의사를 전달하는 이는 더 이상 강력한 초월좌도, 추앙받던 패왕도 아니었다. 


 ─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김독자.


 그저 버러지같이 무력한 개체에 불과했다. 회귀라는 조금 특이한 성흔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한없이 착각하던. 


 1회차와 2회차의 자신을 넘어서고, 까마득한 41회차의 자신마저 이겨내자 묘한 자신감이 생겨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 없이 키워온 자신감은 아니었다. 수천수백의 적을 베었다. 인간도 있었으며, 인외의 존재도 여럿이었다. 무너져가는 나를 증명된 실력으로 세웠고, 종종 실력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엔 김독자의 존재를 생각하며 버텨왔다.


 딱 그 정도의 존재였다 김독자는. 


 부재를 느끼는 순간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오는 존재. 두터운 신뢰감과 함께, 끊임없는 불안감을 선사한 모순된 존재. 나의 3회차에 이름을 준 존재. 유일唯一이라는 어휘는 필시 그가 만들어낸 어휘일 것이다. 그와의 공존을 위해 나는 수백 수천 갈래의 가능성과, 회귀라 불리는 영원을 끊어냈다.


 하필 딱 그 정도의 존재였어서 김독자가…. 


 정신을 차려보면 손아귀 한가득 김독자를 잡아채고 있는 나를 마주한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필요 이상으로 흥분한 유중혁은, 언제나 김독자의 안위와 결부되어 있었다. 회중시계를 손에 감고 별을 헤던 그날도. 김독자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자 미친 듯이 달려들던 별의 증명 시나리오도. 그리고, 김독자의 안위가 눈에 밟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면 나는 종종 일을 그르쳤다.


 "선택하겠습니다. 이 길을."


 그리고 그날도 그러했다. 무리하는 김독자를 차마 보지 못하겠어서 격을 과하게 개방한 것이 문제였던 건가. 함정이 있다는 것을, 지원군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멍청하게도 알아채지 못했다. 고개를 돌릴 힘은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신음하고 있었다. 분해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을 떠안은 채 바르작거려 보지만 김독자만큼 확실하게 '결'의 방향을 틀어놓을 방도가 없어 이를 꾹 다물고 발만 동동 구르고들 있었다.


 나는 길게 묻지 않았다.


 ─ 어째서.


 김독자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었다. 고장 난 장난감처럼 한 단어만을 반복해 한낮의 밀회를 보낸 것에 대해 조금은 놀란 눈치였지만 별을 담은 눈동자에 흔들림이나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 네가 가려고 했던 길이니까. 그 길을 내가 가는 게 당연하잖아, 중혁아.


 아주 잠시,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정신을 놓지 않고 버티는 것도 슬슬 한계인가 싶었다.


 ─ 처음에는 원하는 결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였던가. 중혁이 네가 보고 싶은 결이라면 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그걸 위해 내가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한낮의 밀회도, 말소리도 아닌 생각으로 답했다. 너라면 충분히 읽어가겠지. 그리고는 물었다. 스타 스트림의 저주, 정확히 어떤 저주인지는 알고 있는 건가.


 ─ 알고 있지. 타인과 지금까지 쌓아온 이야기와 관계들을 내 힘으로 유지할 수 없어. 사막의 모래처럼 흩어지는 거야. 관계가 얕아지고 기억이 희미해지고. 언젠간 그들에게서 나라는 존재는 잊히겠지. 앞으로 새로 쌓여지는 관계들 또한 마찬가지. 무얼 해도 인상에 좀처럼 남기 힘들겠지. 있는 듯 없는 사람. 물과 기름이 영원히 섞일 수 없듯, 주위를 빙빙 떠돌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될 거야.


 김독자. 생각으로 녀석을 불렀다.


 ─ 괜찮아. 지금까지랑 큰 변화는 없을 거야. 모두 나 보고 그랬잖아. 인상이 희미하다고, 가장 못 생긴 왕이라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김독자는 나를 얕보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나 도깨비들은 전부 '이야기'에 미친 자들이었다. 때문에 진명을 부르는 것보단 꾸밈말이 잔뜩 들어간 수식언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는 누군가를 저주할 때에도 동일했다.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며 이후로도 사람을 사귈 수 없는, 영원한 고독의 형벌을 이 세계는 '이야기를 쌓을 수 없는 저주'라고 에둘러 말했다. 덕분에 이 저주의 내용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추측하는 이는 드물었다. 아마 저기 있는 이길영도 신유승, 어쩌면 정희원이나 이현성까지도 저주를 백 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겠지.


 김독자는 나 또한 저주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어떻게든 무마해보려 하는 거다. 가장 못 생긴 왕을 입에 담으며 짓는 그 허여멀건 미소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데.


 동료 중 인상이 희미한 사람으로 남는 것과, 어떤 작당을 해도 동료조차 될 수 없는 것은 확연히 다른 일이었다.


 ─ 김독자, 네 녀석… ….

 ─ 그러니 앞으로의 나도, 부디 잘 부탁해 중혁아. 이 이야기도 전부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순간이었다. 눈이 시렸다. 아주 많이. 그리고 다시 한차례 시야가 번졌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시야가 흐려지던 까닭은, 정신을 잃기 직전이라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



 "새 링겔을 갖고 오겠다."


 똑, 마지막 한 방울의 액체가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곤 가차 없이 자리를 떴다. 보나 마나 김독자는 그럴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저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기에 호출 벨이 있지만 부러 몸을 움직였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어서 간호사는 내 손짓만 보고도 무엇이 필요한지 곧장 알아차렸다.


 간호사가 떠난 자리에는 그녀 대신 내가 앉았다. 주저앉았다.


 김독자의 곁을 자처했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김독자에게서 멀리 떨어질 장소가 필요해졌다. 한탄 섞인 긴 숨을 내뱉을 공터가 없었더라면 나약해빠진 정신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져 다시는 기어올라올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확실히 이 짓은, 생각보다도 더 정신을 깎아먹는 짓이다.


 김독자에게 필요한 것이 일반 링겔일 리 없었다. 애당초 설화 팩이 아닌 도구를 들고 녀석의 회복을 바라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시나리오의 결을 본 세계에서, 설화 팩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일이 이렇게 될까 봐 그날 발작에 가까운 행위까지 해가면서 김독자를 막으려 했건만.


 어떤 저주는, 같은 저주라도 저주를 받는 대상에 따라 치명상을 입히느냐 적당한 패널티에서 그치느냐가 갈렸다. 그리고 성좌인 김독자에게 '이야기를 쌓을 수 없는 저주'는 목숨마저도 위협할 수 있는 최악의 상성을 지닌 저주였다. 인간의 몸을 간직하고 있는 화신들이나 초월좌들이야 조금 외로워지는 것 정도로 견딜 수 있겠지. 저주야 살아남아 평생을 간다지만 시나리오의 끝을 이미 본 세계에서 그들의 몸은 다시금 피와 살의 구성으로 돌아갈 테니.


 하지만 성좌는 달랐다. 이야기로 연명하는 자. 


 이야기가 곧 목숨인 자가 그 전부를 잃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내가 그 저주를 받아야 했다.


 결을 보기까지 김독자는 수천 번도 더 성좌를 증오했고 그들을 말살하고 싶어 했으나 본질적으론 녀석도 그들과 다를 수 없었다. 이야기를 잃어가는 그의 안색은 여느 병원 중환자의 것마냥 파리하고 초라했으며, 오랫동안 그 얼굴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찌르듯 아파졌다.


 "유중혁씨가 왜 그렇게까지 저 환자분을 챙기는지 난 잘 모르겠어."


 고요한 밤의 병원, 어디선가 얇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게 말이야. 다른 분들은 TV에도 종종 나오시고 인터뷰도 많이 하시던데, 유중혁씨는 그런 거 하는 모습 한 번도 못 보지 않았어?"


 소리를 따라가 보니 한적한 휴게실이 근원이었다.


 "더 이상 그 끔찍한 시나리오를 이어나가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준 공신인데, 난 유중혁씨가 좀 더 편하고 안락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그러셔도 되는 분이잖아."

 "그치. 그런데 여기서 이러시고 계시는 걸 보면 저 환자분이 뭐 엄청 대단한 분이라도 되셨나 봐. 유중혁씨한테는."


 기척을 죽이고 벽에 기대었다. 나는 어느새 그들에게 시나리오의 종결을 불러온 구세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종결자, 패왕 유중혁. 나뿐만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대부분의 김독자 컴퍼니 일원들은 전부 영웅으로 떠받들어져 사회적 지위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아마 별다른 직업을 갖지 않은 채 TV에 종종 얼굴 정도만 비추어 줘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는데 지장이 없으리라.


 단 한 명, 김독자만을 제외하고.


 "그러고 보니, 그 환자분 이름이 뭐였더라?"

 "김간 방금 링겔 갈아주고 오지 않았어? 근데 벌써 이름을 또 까먹었단 말이야?"


 내 요청으로 링겔을 갈아주고 온 간호사가, 그렇게 건망증이 심해서 일은 어떻게 하겠냐며 동료 간호사들에게 타박을 받고 있었다. 장난이 반, 진심이 또 반. 그렇게 한참을 시시덕거리던 그녀들은 그러나, 머지않아 알아챘다. 자신들 중 그의 이름을 온전히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음을.


 "이상해. 그렇게 어려운 이름이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유독 안 외워진단 말야."


 머릿속에 입력하면 누가 지우개를 들고 와 다시 지워버리는 것도 아니고. 이어지는 착잡한 듯한 말에 주르륵, 기대 있던 벽에서 흘러내렸다.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가 김독자의 이름을 잊어버린 작금, 그가 이 병원에 여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 권유와 자금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이 병원을 나가야 할까?"


 그 사연을 알 리 없는 김독자는 매일을 두려워했다.


 "아니면 모레이려나."


 오늘 오전, 창밖을 내다보며 날짜를 세는 듯한 그 모습이 괘씸했던 나는 탁상 위의 달력을 치워버렸다. 그러자 조용히 날 올려다보던 김독자가 천천히 그 말랑한 입술을 벌려냈었다.


 "중혁아 「마지막 잎새」라는 소설, 알아?"

 "… 알아도 왠지 대답해주고 싶진 않군."


 퉁명스러운 대답에 김독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곤 나긋하게 중얼거렸다. 중혁아 책 좀 읽어. 책 읽는 것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댔는데 넌 어쩜 그러냐. 저 녀석을 죽일까 몇 번이고 진지하게 생각을 가다듬는데 어딘가 쓸쓸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존시라는 가난한 예술가가 폐렴에 걸려 누워 있었대. 희망이 없는 존시는 창밖만 바라보며 떨어져가는 잎새를 봤어. 저 이파리들이 다 떨어져 버리면 나도 죽겠지, 존시는 생각했어. 보다 못한 동료 예술가 수가 베어만이라는 아래층 영감을 찾아가 존시의 이야기를 했대."


 "그러자 존시의 어리석음을 지탄하던 베어만 영감은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데도 불구하고 지붕에 담쟁이넝쿨 이파리를 그리다 폐렴으로 죽는다. 평생 걸작이라곤 한 작품도 그려보지 못하고, 쥐꼬리만큼 번 돈은 술을 사는 데에 전부 바친 주제에. 정말 멍청한 영감이지 않나."


 노화가 베어만의 이야기를 하다 그만 입안이 써 미간을 찌푸렸다. 


 행복이라곤 마음껏 누려보지도 못하고 언제나 결핍된 시궁창 안에서 살아오다 인생의 마지막마저 타인의 삶을 위해 희생해버리다니. 그 이야길 알고 있었어? 같은 말이나 띄엄띄엄 이어내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는 저 녀석이야말로 누구보다 완벽한 '베어만'이 아니던가.


 "중혁아. 나를 위해 담쟁이넝쿨 이파리를 그려줄 거니, 넌?"


 김독자가 나에게 묻고 있었다. 멈춰버린 내 시간과 내 세계의 태엽을 감아주겠니.


 멈춰버린 이들의 부활을 위해 태엽을 감던 이는, 남의 태엽을 감다 그만 자신의 태엽이 멈춰 버렸다. 비바람도 무섭지 않던 용감한 베어만 영감은, 어느새 침대에 누워 죽음만을 세어보는 바보 같은 존시가 되어버렸다. 


 "김독자, 나는 …."

 "그려주면 안 돼. 너는."


 입을 떼기가 무섭게 김독자가 말을 가로챘다. 단호해진 목소리에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엉망이 된 몸과는 달리 각오라도 품은 양 그의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나를 얼만큼 기억하지, 유중혁?"

 "네 생각보다 훨씬 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김독자."


 김독자는 내게 기대고, 최후까지 함께 있어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마지막 잎새를 들먹인 게 아니었다.


 "말로는 꾸며내기 쉽지. 기억이 사라져 감에도 기억하고 있다는 거짓말은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마지막 모습을 내게 보이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냉정하다 못해 표독스럽기까지 한 그 위악은 흡사 헤어지기 전 억지로 정을 떼어내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질 않아서.


 "잊었나, 김독자. 생과 사를 함께한 동료.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네가 정을 떼길 원한다면, 철저히 거절해 주마.


 "빠르냐 느리냐의 차이 정도야. 봐, 함께 거대 설화를 쌓았음에도 얼마나 쉽게 그 이야기가 무너지는지. 더 이상 신유승도, 이길영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 나는. 언젠간 너도 날 보고 누구였냐고 물을 걸?"

 "김독자."

 "아 물론, 그것도 네가 이 병원까지는 어찌어찌 찾아왔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고. 중혁아, 기억을 잃은 너가 나를 찾을 수나 있을까?"


 다만 나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호랑이는 이빨이 빠져도 호랑이듯이, 김독자는 이야기의 결핍을 앓아도 김독자라는 사실을. 세치 혀로 수많은 성좌들을 홀렸던 김독자였다. 성좌들의 흥미를 돋우고, 때론 도발하였으며, 얄밉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던 김독자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리고 녀석이 나를 일부러 도발하고 있단 걸 알면서도 부아가 치미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기억한다."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낮은 목소리로 그를 을렀다.


 "저 스스로를 예언자라고 소개하며 동료를 자처하던 미치광이 같던 첫 만남의 네 녀석도. 내가 가질 마왕의 자리마저 빼앗아 허망하게 사라지던 네 녀석도. 웬 동떨어진 구역에서 내 행세를 하며 이름을 팔던 네 녀석도. 이계의 신격에 홀로 대항한답시고 3년씩이나 자리를 비우던 네 녀석도…!"


 짓씹듯 내뱉던 목소리가 조금씩 격양되었다.


 "크고 작은 일들, 네 시시껄렁한 버릇까지 늘어놓아야 받아들일 속셈인가."


 점점 데시벨을 높여가던 목소리를 겨우 가라앉히고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패기 좋게 나를 도발하던 낯짝은 어디 간 건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독자는 목을 길게 뺀 겁쟁이 타조가 되어 있었다.


 "이지혜도, 이현성도. 유상아도 한수영도. 그리고, 신유승과 이길영까지도. 삶을 나누던 동료들이 죄다 너를 잊었는데 나 혼자 너를 기억하고 있는 게 못내 두렵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나."


 정곡을 찔린 건지 그는 말이 없었다.


 "그 녀석들과 난, 이야기가 쌓여온 세월 면에서 비교할 계제가 못 될 텐데."


 전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김독자.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던 시선들을. 때론 따스함으로, 때론 기대감으로, 때론 동경으로 시시각각 변해가던 그 시선들을 나는 잊을 생각이 없다. 무엇 하나 외면하지 않을 테다.


 "이야기를 쌓을 수 없는 너라고 해도, 나는 너와 이야기를 쌓고 싶다. 김독자."


 그는 뒤늦게서야 품에 기대어 왔다. 가면을 벗어낸 그는, 떨고 있었다.



*



 "그럼 당직실에서 좀 자고 올게."


 휴게실 안에서 걸어 나오는 기척이 나자 몸을 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독자의 이름과 존재를 잊어가는 그네들의 이야기가 발단이 되어, 잠시간 감상에 젖었다. 오전에 있었던 김독자와의 다툼에 관자놀이까지 지근지근 아파지는 기분에 옆 이마를 꾹꾹 눌러댔다.


 쓸데없는 청승 떨지 마라며 듣는 이들의 귀가 닳도록 얘길 해댄 건 언제나 나였는데. 어느새 청승을 떨고 있는 이 또한 저 자신이 되었다.


 "그러니 내가 쓸데없는 청승을 떨지 않도록 네가 좀 잘 해라. 김독자."


 허공에 대상 없는 넋두리를 내뱉고 병실 문을 열었는데, 시야 안에 찾는 이가 없었다.


 "김독자?"


 빠른 시선으로 방 안을 훑었다. 마구잡이로 열려 있는 병실 안 옷장, 걷어차인 듯 뒤엉켜 있는 이불. 엉망으로 뽑혀져 나뒹굴고 있는 링겔과 도둑이라도 들었던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흐트러져 있는 바닥. 난장판이 된 공간 안에 김독자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혁아, 나 무섭다.


 아까 전 그 떨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불안감이 엄습해 바삐 외투를 걸쳤다. 휴대폰을 잡아들고 병실 문을 나섰다. 실종 신고를 할까, 충동적으로 112까지 눌렀다가 이내 화면을 꺼 버렸다. 경찰이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제발 멀리 가지만 말아라. 김독자."


 달음박질로 병원 계단을 내려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통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다. 


 오전에 나를 떼어놓으려 위악을 부리던 김독자는 가면을 벗고서야 속내를 드러냈었다.


 "나 무서워 중혁아."


 품에 안겨 토닥임을 받는 내내 그는 무섭다는 말만을 반복하였다. 그러다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요즘 사람이 그냥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냐는 되물음에도 그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부스럭거리며 자세만 조금 틀었을 뿐. 그가 자세를 바꾸자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속눈썹 대신 말랑한 입술이 닿아왔다. 그리고 그 체온은, 감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얼음장 같았다.


 "사람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보여. 시나리오가 진행되던 시절의 화신들이 그랬듯이. 이젠 시나리오고 화신이고 전부 사라졌는데. 이야기의 집합체가 아니라 피와 살로 구성된 사람의 육체일 텐데. 웃기지?"

 "… …."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아먹고 살듯이, 성좌들은 이야기를 먹고살잖아. 너도 기억하겠지. 그토록 증오했던 미식협. 스스로 성좌가 되면서도 저런 악종들은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잃고 육체마저 분해되어 사라질 상황에 처하니까 본능이 갈증이 되어버린 거야."


 차디찬 입술이 내 어깨를 머금었다. 딱딱한 윗니와 아랫니가 살갗에 닿아옴과 동시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스쳤다. 


 "중혁아. 내가 널 물어뜯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너는, 정말 사랑스럽다 못해 맛있기까지 한 이야기인데. 그가 말을 맺음과 동시에 맞닿았던 이빨도, 입술도. 천천히 어깨에서 떨어졌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까지 스륵 풀어낸 후에야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을 장악한 감정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을 혐오하다 못해 목 졸라 죽이고 싶어 하는 살의에 가득 찬 얼굴. 거기에 김독자의 바닥이 있었다. 저 맨얼굴을 나에게 드러내기 위해 녀석은 매일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부림쳤겠지.





 코인으로 증량된 체력과 힘은 사라졌어도 몸만은 수만 번에 달하던 그 민첩한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는지, 한달음에 병원 건물을 벗어났다. 건물에서 나오고서야 나는 계절과 맞닥뜨렸다. 겨울이 내리고 있었다. 새하얗게 쌓여 밟을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는 눈.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그 하얀 눈덩이가 그를 찾는 시야를 방해했다.


 막연히 추울 것이라는 생각은 하였지만, 예상 이상으로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초라한 인간을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리를 바삐 가누면서도 손으론 연신 겉옷을 여미어냈다.


 병실에 누워 죽을 날만 세던 것은 김독자 뿐만이 아니었다. 모르는 사이 내 시간과 계절마저도 혹자의 말마따나 그곳에 고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독자!"


 골목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희뿌연 입김이 나옴과 동시에 폐까지 시린 기운이 훌쩍 들어섰다.


 "김독자! 어디 있나! 대답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손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장이 하나하나 꼬여가는 듯한 고통과 압박감이 숨통을 조여왔다.


 "왜 가버린 거냐, 김독자! 어디로 가 버린 거냐!"


 병원 근처의 골목이란 골목은 전부 돌았다. 겨우 성인 남성 하나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은 외진 길까지. 그럼에도 익숙한 그 동그란 뒤통수도, 늘상 입고 있어 이제는 일상복 같아져 버린 하이얀 병원복도. 그토록 내가 좋아했던 멍청한 웃음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속절없이 내리는 함박눈에 참았던 설움이 툭 튀어나왔다.


 "너는 무섭다고 했다. 초라한 바닥을 보여 버렸지만 곁에 있어달라고 했다. 기댈 곳을 찾는다고 했다."


 닿지 못할 말들을 쏟아부었다. 


 "내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네 기댈 곳이. 최후의 최후까지 잠들 요람이. 그런데 어째서…."


 역시 못 미더웠던 것인가. 거침없이 내뿜어지던 속상함도, 억울함도, 결국 나 스스로를 겨냥하는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언제나 두려웠다. 네게 못 미더운 존재가 되어 홀로 남겨지는 것이. 그 두려움이 내 발목을 묶는 사슬이 되어 내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너를 버릴 순 없었다.


 "김독자!"


 시커멓게 그을린 심장을 쥐어짜내며 그 이름을 외쳤다. 남은 힘을 다해 뜀박질을 했다. 어느새 대로변이었다. 모두가 잠든 도시는 잠잠했다. 불이 켜진 가게 하나, 도로 위를 달리는 승용차 하나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백여 개에 가까운 시나리오를 거치며 인간들의 가치관은 부와 명예를 쌓아올리는 것보다는 생존, 제 목숨 하나 건사하는 것에 더 중심을 두기 시작했으니. 정신이 거꾸로 박힌 인간이 아니고서야 이 시간대에 보금자리 밖으로 나오는 이는 없었다.


 띄엄띄엄 서 있는 신호등이 쏘아보내는 색색깔의 빛과, 간혹가다 만날 수 있는 가로등이 내뿜는 노오란 빛에 의존해 김독자를 찾는다.


 "김독자! 손에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가끔 슬픔을 뚫고 올라오는 분노가 대로변을 울렸다.


 알고 있었다. 더 이상 김독자는 정상적인 방법으론 존재할 수 없음을. 그의 이름 석 자가 이미 하나의 병증이 되어가고 있었다. 설화 없는 세계의 설화 미식가. 그 어떤 약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병을 떠안은 채 고독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운명에 씌인 자. 


 사라진 그를 찾는 건 단순히 개인적인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일 결핍과 갈증으로 눈이 멀어버린 김독자가 이대로 떠돌다 민간인을 마주치게 된다면…. 틀림없이 치명적인 재해였다.


 "김독자?"


 한참을 어슬렁거렸을까. 어둠 속에서 기묘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인영人影은 허리춤까지 그림자가 져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가만히 인영의 걸음걸이를 눈으로 좇았다. 대로 건너편에 있던 인영이, 파란 불이 켜진 것도 아닌데 거대한 8차선 도로를 주춤주춤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사방에서 파란 불이 켜지며 그 초록 불빛이 인영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 …!"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한 몸 던지다시피 달려갈 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달리다 한 번은 몸에 힘이 쭉 빠져 그대로 주저앉았다. 꽁꽁 언 도로 바닥에 바지가 쓸리고, 무릎이 따끔따끔 아파왔지만 일어나서 마저 달렸다. 


 "김독자!"


 그곳에 그가 있었기에. 


 그의 반 쪽 얼굴은 초록 불빛이, 또 다른 반 쪽 얼굴은 붉은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머리며 어깨에 닿는 눈은 체온으로 인해 녹을 법도 하건만. 범인凡人의 체온보다 훨씬 낮은 체온 때문인지 가만히 쌓여만 있는 눈이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제대로 걸친 겉옷 하나 없이 얇은 병원복에 맨발로 나온 녀석의 기행에 나는 탄식했다.


 "아무리 급해도 옷 정도는 제대로 챙겨 입고 나왔어야 했다…. 아."


 그에게 입고 온 겉옷을 둘러주다 마주한 눈동자에 말을 잃어버렸다.





 오롯한 식욕만이 텅 빈 동공을 채우고 있었다. 

 김독자는, 내게서 도망치기 위해 눈길을 달려 나온 것이 아니다.





 그 명백한 명제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한 편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 이제는 결정해야 했다. 칼을 뽑아들 수 있는 것은 지금뿐. 이성을 되찾은 이후의 김독자가 얼마나 깊은 자괴감의 수렁에 빠질지는 불을 보듯 뻔해서.


 확실히, 그가 더 이상 엇나가지 않도록 여기에서 그의 명을 끊어주는 것 또한 그를 향한 애정의 한 가지 발로이리라. 그러나,


 "나를 먹어라, 김독자."


 나는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 근처에 목덜미를 들이밀었다. 차가운 입술이 츕츕대며 목덜미를 머금다 이내 송곳니를 콱 박아 넣는다. 작은 어금니로 잘근거리자 살갗을 따라 선혈이 흐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새벽녘, 8차선 도로의 한복판에서 신호마저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흡혈 행위라니. 이 무슨 우스꽝스러운 광경인가.


 원한다면 김독자가 언급했던 소설 속의 노화가가 되어 모든 걸 내어주기라도 할 셈이었는데, 행위의 대상이 나였기 때문이었나.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발작적으로 내 이름을 불러댔다. 욕을 했다. 울먹거렸다. 허공에 대고 구역질을 했다. 씹어 삼킨 것도 얼마 없는 주제에 기어이 속을 다 게워내고서야 김독자는 눈물과 핏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돌아가자. 김독자."


 조금 어지러운 머리를 바로 하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주 오랫동안, 지옥 같은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악몽은 앞으로도 한동안, 그리고 아주 오래…. 나를 괴롭힐 것이다.





 아아, 나의 악몽이 손을 잡는구나.





 우리는 일렁이는 눈보라 속을 하염없이 걸었다. 


 하나는 병에 걸린 이었으며, 하나는 병에 걸리게 한 이였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내가 저주를 받지 않게 하고자 김독자 그 자신이 저주를 향해 뛰어들었음에도, 저주와 죄업의 흔적은 종국에 내 몸을 뒤덮는다. 둘은 곧 하나가 되어, 난치라 불리는 병을 나누어 짊어진다.


 어떠한 ■■은, 병증의 형태를 띠리니,


 "사랑한다. 김독자."


 닫힌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의 태엽을 감아주는 존재가 되겠지.


 그에게 몸을 의지하고는 눈을 감았다.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피가 하얀 순수를 물들이고 있었다.




치명적이더라도 내게만 머물기 바라는 난치의 기억

내게서 자라나다 내 안에서 죽어야 하는 너라는 병

― 윤의섭, <감염> 中












 "사부는 주로 무슨 꿈을 꿔?“


 이지혜의 질문은 2회차에서 시작되었다. 10회차, 17회차, 한 번은 60회차가 넘어가서야 다시 되풀이되었고, 500회차가 넘어간 시점부터는 듣지 못했다. 그래도 열 손가락을 넘어서는 질문의 횟수 내내 유중혁은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다.“


 본디 꿈이란 것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스타스트림은 꿈에 대한 가장 유명한 이론 중 하나를 제 품에 안았다. 어느 누군가는 이론의 사실 여부를 따지려 들 수도 있었으나 스타스트림의 세상이라는 것은 그럴싸한 이야기를 쌓아올려 형성된 현실이지 않던가. 유중혁이 이 이론을 멸살법의 안에서 마주한 것은 400회차 대에서 발견한 어느 히든 시나리오 때문이었다.


 자신의 꿈속에 들어가 나타난 상대를 이기시오. 패왕에게 누군가를 이기라는 조건은 가볍고도 익숙한 존재였으므로 유중혁은 거부감 없이 시나리오를 시작했다. 깜빡. 유중혁은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몸의 감각을 갈구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계. 빛줄기 하나가 없는 무(無)가 화신 유중혁에게 주어졌다. 당혹감을 접어내며 회귀자는 자리에 앉았다. 앉았나? 아니. 그는 앉지도 떨어지지도 못한 채 무(無)의 틈새에 형성된 유일한 존재였다. 그에게는 앉을 자리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 곧 공간이 형성되겠지. 언제나의 믿음을 지니고 그는 회귀자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런 그에게 바쳐진 것은 스타스트림의 일상적인 배신이었다. 유중혁은 무언가가 나타나기를 꼬박 이틀을 기다렸고, 하루는 빛줄기 하나 없어 제 몸조차 분간할 수 없는 세상에 진천패도를 휘둘렀으며, 딱 6시간을 다시 기다리다가 목을 그었다. '멸살법'에서는 그 상황을 두고 화신 유중혁에게는 꿈의 공간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그렇다면 사부는 무슨 꿈을 꾸고 싶어?“


 꿈도 꾸지 않는다니, 사부답다며 키득이던 아이가 그 끝에서 결국 서글픈 얼굴을 한다. 유중혁은 가끔씩 이지혜가 비추는 저것에 애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저는 받을 필요도, 가치도 없는 감정이나 제 유일한 제자의 감정은 그가 아이를 거둔 시점부터 지속되어온 것이기에 그 이상의 평가는 하지 않았다. 있지, 사부. 그런 말로 시작한 운율의 뒤에는 모든 회차에서 동일하게 질문 하나가 더 얹힌다. 유중혁은 대답하지도 않고 몸을 돌렸으나 수면 위에 던져진 돌은 사내의 미간을 짧게나마 좁히고 말았다.


 꿈. 유중혁은 어째서 꿈을 꾸지 않는가? 유중혁의 인생에서 꿈이란 것이 온전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얕은 허상에 의미를 두기에는 그가 품어야 할 것이 너무 컸다. 한계는 아니었으나, 가치가 없었다. 17회차의 어느 날 유중혁은 과감히 모든 꿈을 내던지고 눈앞의 현실에 뛰어들었다. 상실을 알리는 아주 간단한 창 하나가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그는 자신을 몰아붙이는 일에 익숙했으므로 인간이 응당 받아야 했던 꿈이라는 이름의 휴식이자 권리를 포기하는 일에 의문조차 표한 적이 없다.


 스타스트림이 바라고, 꿈의 주인인 유중혁이 막지 않았으므로, 꿈은 그의 삶에서 소멸한다.


 이 잔혹한 스트림은 화신의 제물을 기꺼워하며 온 은하수에 유중혁의 비극을 전시하기 위한 무대를 준비했다. 고통을 자신들의 상품으로 판매하는 스타스트림은 제 본분에 충실하여 그의 선택에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선사하는 아량을 베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유중혁은 이 광경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에 타인보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던전 하나를 클리어하고, 보상 물품을 이지혜에게 던져줬었다. 퍽 괜찮은 방어구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음번에는 저도 데려가달라며 말하던 제자에게 대답조차 하지 않고 방에 들어갔지. 그리고 잠에 들지 않았던가. 유중혁은 진천패도의 손잡이를 잡고 주변을 둘러본다. 매캐한 매연.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하늘. 주변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말소리가 웅웅댄다. 새로운 시나리오라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한 낯선 환경이다. 상황에 대한 이해보다도 방어적인 태도가 먼저 발도를 위해 몸을 굽혔다. 클리어 조건은? 유중혁은 이를 악물고 시나리오의 조건을 찾아 손을 허공에 휘젓는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는 아무런 시스템 창이 떠오르지 않았다. 멸망하지 않은 서울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한참 저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멸망하지, 않은. 멸망하지 않았다고? 유중혁은 한 박자 늦게 그 단어를 입술로 훑어냈다. 제가 뱉어내고도 인정할 수 없는, 어쩌면 인정하기 싫은 공간을 사내가 인지한다. 아. 납득 불가한 현실을 두고 그는 하나의 가설을 끌어올렸다. 꿈. 허상. 그 모든 것을 의미하는 언어들이 후두둑 쏟아진다.


 진짜 잘생겼다. 감탄사에 가까운 목소리에는 평온이 그득하다. 부서진 흔적 하나 없는 말쑥한 거리가 초월좌를 반겼다. 41초. 유중혁은 어느 쪽이 진실이며 환상이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딱 그만큼의 시간을 사용했다. 이곳이 환상이다. 그래야만 한다. 유중혁은 이 꿈을 악몽으로 규정한다. 아주 간만의 꿈이었으나 가장 혹독한 비극을 위해 행복을 선사하는 스타스트림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이 세계에서 유일한 이방인에 도달한 초월좌가 사람들을 피해 달리기 시작하고, 누군가가 멋지다며 박수를 쳤다. 그는 한 때 그가 사랑했던 세계로부터 구경거리의 취급을 받고 만다. 아, 성좌들의 시선보다도 고약한 모양새다.


 인적이 없는 공간을 찾아 사내가 달려나간다. 유중혁은 제 다리가 주작신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달리는 것이 얼마만이던가. 파천검성의 아래에서 수련을 하던 시절이 기억나다가도 막히지는 않는 숨에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의 거리는 원래 이렇게나 북적이던가. 사내는 겨우 그림자가 겹겹이 쌓인 골목 사이에 몸을 묻었다. 흘러가던 이야기 중 8할은 유중혁의 외모와 옷을 보고 영화 촬영이냐며 떠들어대는 것이었고, 나머지 2할은 그를 두려워하는 언어였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유중혁이 수 백 개의 회차 동안 쌓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유중혁은 뼈저리게 이해한다. 에덴, 마계, 명계, 그 어느 공간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고독이 그의 목을 죈다. 화신을 구성하는 것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유중혁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화신 유중혁은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유중혁은 차디찬 콘크리트에 몸을 뉘이고 숨을 훅 들이켰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꾸고 있는지 알 턱이 없다.


 유중혁은 제 뺨을 쳤다. 묵직한 파찰음이 좁은 골목에 울린다. 화끈하게 몰려오는 고통에도 그는 꿈에서 깨지 않았다. 인간은 무슨 짓을 해서 꿈에서 깨어나더라. 그 다음은 손등을 꼬집었고, 또 그 다음에는 허벅지를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으나 변하는 것은 따가운 살갗뿐이었다. 스타스트림은 무엇을 바라고 자신을 이 세계에 떨궜는가. 이 또한 하나의 자극성을 위한 쇼라면 유중혁은 기꺼이 그 판을 부술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사내는 무엇을 부숴야할 지 가늠을 하지 못했다. 그의 주변에는 온통 평화만이 가득하다. 지나가는 사람 중 누구든 잡아 죽이고 나면 무언가가 바뀔까. 지표를 상실한 회귀자가 공포감에 휩싸여 제 몸에 벌건 자국들을 내리친다.


 유중혁은 온몸이 화끈거리고 나서야 가설 하나를 꾸깃꾸깃 펼쳤다. 화신 유중혁은 꿈을 꾸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꿈이 아니다. 동시에 유중혁의 현실도 아닌 공간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유중혁은 애써 신기루라는 단어를 골라 땅에 박아두었다. 평생 제 손 위에 얹힐 리는 없는 평화가 회귀자의 곁을 스쳐지나간다.


 스타스트림의 세계는 이야기가 정립해야만 존재할 가치를 얻는다. 벽에 기대어있던 유중혁은 고개를 휙 돌렸다. 한참을 떠들어대던 목소리들은 어느새 사라져있다. 각자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은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목표를 위해 살아간다. 시나리오라는 일종의 틀을 벗어난 자유로운 인생들은 사내의 존재로부터 금방 관심을 거둬들인다. 그러므로 저들은 유중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방금까지도 새로운 자극을 향한 관심을 내비췄을 뿐, 그것이 유중혁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이나 지속적인 감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순간 반투명해진 손이 빠르게 스파크를 일으키다가 다시 제 형태를 찾았다.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의문이 가득한 세계에서 유중혁은 가장 중요한 의문 하나를 앞세운다.


 화신 유중혁은 어떠한 연유로 이 세계에서 존재할 개연성을 얻었는가?


 이곳이 유중혁의 세계가 아니라면 그는 묻히고 스러져 흔적조차 없이 소멸되어야했다. 그는, 이 세계에서 아무것도 아닌 개채이므로. 유료화 이전의 세계는 어땠더라. 나는 이야기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몸으로 존재하던가. 유중혁은 흉이 가득한 손을 내려다보고 코웃음을 친다.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이 세계에 뿌리내린 자가 아니기에 그러한 축복의 범주에서 벗어나있다.


 “그러니까.”


 너는 누구지. 유중혁은 천천히 몸을 돌린다. 끈덕지게 달라붙은 시선 하나를 그가 마주한다. 스타스트림의 그 무엇보다도 애정 어린 감각. 이 세계에 자신을 불러내고 살게 하는 것은 그인가. 스킬조차 없어 깊게 가라앉은 흑빛의 눈동자가 짤막한 몸뚱이를 훑어낸다. 자연스레 진천패도로 향한 손이 허공에서 미끄러졌다.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회빛 눈동자. 중학생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작고, 깡마른 사내 아이 하나가 패왕을 바라보며 골목 끝에서 쭈뼛거린다. 제 여동생도 중학교 입학 전에는 저것보다 컸던 것 같은데. 아, 죽어버린 제 동생. 유미아. 어설픈 연상(聯想)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저 얇은 목을 흉포한 손가락이 틀어쥐었을 터다. 저를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에서 뭔가를 느끼기라도 했는지, 아이는 한참동안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강해요?"

 "…."

 "그러니까, 음, 나쁜 사람을 이길 수 있을만큼요."

 "나쁜 사람?"


 이 평화로운 거리에 나쁘다고 지칭될 법한 재앙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그를 이 알 수 없는 시나리오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중혁은 성큼 발을 내딛었다. 크게 줄어드는 거리에 아이가 뒷걸음질을 치려다가, 무슨 생각인지 꼿꼿이 몸을 세우고 다시 사내를 올려다본다. 그제야 사내는 아이의 몸에 묘한 상처자국이 넘치는 것을 발견했다. 명백한 인간의 구타 흔적이다. 벌겋게 부은 뺨과 목덜미니 쇄골 부근에 박힌 멍이 용케도 뼈가 부서지지는 않았군, 하는 건조한 감상평을 일으킨다. 아동학대라도 당하는 모양이지. 제가 바라던 대상은 아닌 듯 해 유중혁은 여전한 무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춘다. 저를 보고도 겁이 없는 꼴이 꼭 제 제자를 보는 것 같아 유중혁은 묘한 감상에 엉켜들었다. 나쁜 사람이 친척 같은 어른들이라면 제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공간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시나리오가 저 따위 조건으로 클리어 될 리가 없으니.


 “이길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내가 죽여야 할 이유는-,”

 “그럼 알려주세요.”


 사내가 빠르게 미간을 구긴다. 무엇을 알려달라는 거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제 손으로 죽이기라도 해야한다는 말인가. 아이는 구겨진 유중혁의 얼굴을 보더니 흠칫 몸을 떨고 손을 허둥댄다. 나는, 나는 강해지고 싶어요. 그러면 아프지 않을 수 있잖아요. 유중혁은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아이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사내의 뒤를 좇았다. 뒤를 힐끗이지도 않고 유중혁이 골목을 휙 뛰어나간다. 단념시키는 쪽이 좋다. 누군가는 잔인하다 말할지 모르나 그는 이것을 최선이라 말한다. 평범한 세계에서 살인은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다. 어린 아이의 손으로 할 수 있을 일도 아닌 것을, 어째서 저 작은 몸으로 해낼 생각을 했을까. 


 “왜 알려주지 않아요?”

 “내가 왜 알려줘야 하지.”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네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알려줘야하나.”

 “그러면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것도 안 되나요?”


 나는 강해지기만 하면 돼요. 아이는 입술을 꽉 악물었다. 엄마를 지키고 싶어요. 나도 지키고 싶어요. 죽고 싶지 않은 걸요. 고작 열셋 남짓 되어보이는 어린 아이는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뒤에서 기이한 다짐을 한다. 사채라도 쓴 집인가 싶어 유중혁의 발걸음이 늦춰졌다. 그냥 지금 죽여버릴까. 뭐가 되었든 귀찮다. 관여할 이유가 없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여동생 또래의 아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멈추고 머뭇거리는 제 자신이 가장 번거로웠다.


 “지키는 법을 배우고 나면 뭐가 달라지지.”

 “적어도 죽지 않을 수 있겠죠.”


 저 나이의 아이가 죽음을 논하는 게 우스워서, 유중혁은 결국 몸을 돌린다. 딱 한번이다. 어차피 깊게 관여하는 것조차 불가한 몸이겠지. 그만큼의 개연성을 부담할 능력이 저 아이에게는 없다. 유중혁은 제 허리에나 겨우 오는 아이를 바라보며 진천패도를 바닥에 박았다. 생채기가 가득 매인 손을 잡고 굴러다니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다가 손에 얹어주었다. 꽉 쥐고. 흔들리지 않게. 칼을 놓치면 바로 물러나라. 휘두르는 것보다는 찌르는 게 낫다. 뭐가 되었든 상대가 찔리면 다가가지 마. 무기에는 원래 주인이 없다. 어디까지나 방어의 목적이어야 한다고, 그런 마지막 당부와 함께 유중혁이 아이의 손에서 나뭇가지를 빼앗았다. 그를 마주한 이래로 한번도 웃지 않던 아이가 웃음을 지어보였다. 말갛고 희멀건 웃음이다.


 “감사합니다.”

 “이름은 뭐지."

 “아, 이름. 그, …■■■, 요.”


 ■■■? 유중혁이 필터링 된 이름을 읊조린 것과 동시에 세계가 점멸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디선가 익숙한 캐롤송이 울렸다.




 덜컥.


 사내가 몸을 일으킨다.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몸이 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멸망한 세계가 화신 유중혁을 반겼다. 시나리오 창은 여전히 시행 중이던 메인 시나리오의 내용을 뱉어냈다. 돌아왔나. 유중혁은 문득 제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걸 인지했다. 돌아, 와? 어디로부터. 비상등을 울리는 기시감에도 주변은 평온할 뿐이다. 이마에 맺힌 차디찬 땀방울을 훑어내고 있으니 벌컥 문이 열렸다.


 "사부, 아직 자는 거 아니었어?"


 자연스레 눈길이 문을 향한다. 유중혁 씨, 괜찮으십니까? 제 꼴이 그 정도로 이상한가. 그는 이현성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눈길을 한번 주었다가 삐걱이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 크리스마스잖아! 그래서 놀러갈 생각 없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간만에 생긴 기회인데 괜찮지 않겠어요?"

 "피의 크리스마스를 벌여보자고!"

 "멍청아. 난 그냥 크리스마스 말한 거거든?"

 "유중혁 씨도 조금은 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유중혁은 짧게 숨을 뱉었다. 그래. 무리를 했나. 그닥 어려운 던전은 아니었으나 이런 컨디션으로는 애꿎은 회귀만 재촉할 뿐이다. 축 늘어트린 근육을 주무르며 사내는 몸을 일으킨다. 뎅, 뎅. 캐롤송과 함께 이미 멸망해버린 세계에도 크리스마스는 어김없이 인간들을 찾아왔다. 산타 복장을 한 괴물이 시내 구석에서 포효를 내지르고, 시나리오를 받은 화신들이 괴물을 향해 칼날을 들이민다. 후딱 해치우고 놀러가죠! 그렇게 소리친 제자를 향해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 한 방울을 마지막으로 유중혁은 제 현실에 몸을 묻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자신의 현실로 화신 유중혁이 되돌아왔다.



*



 유중혁은 눈을 떴다.


 한참 하던 자살을 그만두고 유중혁은 이번 회차를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문득 죽어가던 제 제자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어떤 동료도 거두지 않고 회귀자는 홀로 세상을 떠돌았다. 성좌들의 목을 틀어쥐고 살아남았을 옛 동료들의 앞길을 제멋대로 열어젖히다 옆구리가 터져 기절을 했던 기억이 그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그러므로 이 좁은 공간은 적어도 유중혁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은 어디지. 본디 이 무뚝뚝한 회귀자는 타인에게 말을 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무지의 상황에서는 질문만이 해답이라는 걸 모르지도 않았다. 덜컥. 낡았는지 뻑뻑한 문이 열리고 유중혁은 진천패도를 빼들, 어, 야했는데.


 "그, 안녕하세요."


 왜소한 몸. 사내 아이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닫힌 문에 달라붙어 회귀자를 마주한다. 유중혁은 단박에 저를 향해 인사하는 아이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냈다. 잠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것을 기억이라 부를 수 있다면야. 어째서 그때의 일을 잊고 있었을까. 교복 위에 달려있어야 하는 명찰은 기이한 뒤틀림을 표방하며 제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마치 온 세계가 저와 아이의 사이를 갈라두려는 듯 그를 보호한다. 이름을 물어보려던 사내가 이전의 만남을 추억하며 묵묵하게 입을 닫았다. 이름만 알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서 추방당하지 않는 것일까. 유중혁은 여전히 이방인의 딱지를 달고 있으나, 이전보다는 조금 더 선명한 몸의 형태에 여전히 머뭇거리는 선형의 주인이 가진 개연성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대체 그는 누구이기에 사람 하나의 믿음으로 저를 존재할 수 있게 한단 말인가?


 "배는 안 고프세요?"


 상처가 있길래 응급처치는 해뒀어요. 정말 별 건 아니고 그냥 약 발라두고 붕대 감은 거예요. 여기는 제 집인데, 마침 친척들이 다 여행을 가서요. 이틀 뒤에는 돌아오니까 그때 까지는 계셔도 돼요. 문장 몇 개를 늘어두던 아이가 무릎을 쭈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숨기지도 못한 걱정에 한숨이 차오른다. 대체 누구를 걱정하겠다고. 유중혁은 아이의 몸에 여전히 상흔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칼을 쓰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간단한 격투술이라도 가르칠까 싶다가, 빼빼 마른 팔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단념했다. 가르치다가 부러지면 그것대로 큰일이다. 유중혁은 가부좌를 틀어 이 공간이 마치 제 것인 양 자리를 잡았다. 아무리 살펴도 특별할 게 없는 아이 하나와 인연이 엉킨다는 감각을 지울 수 없다. 키가 크고, 나이가 조금 더 들었구나 싶은 모습에도 여전히 젖살이 남아있다. 여전히 어린애다. 동생인 유미아를 다루는 것과는 전혀 다른, 화신 유중혁에게는 부재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술이 상대와의 시간에서 요구된다. 유중혁은 클리어 조건을 알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남는 어려움을 몇 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실감했다.


 "나를 기억하나?"

 "크리스마스 요정님이요."


 대인관계가 어려워도 정도가 있지. 아이는 퍽 진심으로 제가 한 말을 믿고 있는지 회빛 눈 안에 묘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미쳤군. 유중혁은 거침없이 제 소감을 뱉어낸다. 입술을 비죽이는 걸 보면 적어도 울 지는 않을 것 같아 낡은 회귀자가 안도를 삼켜낸다.


 "내가 요정 따위로 보이나?"

 "아, 역시 산타 할… 아니, 아저씨인가요?"


 요정이 나았군. 유중혁은 복잡한 심경을 억누르며 제 미간을 구겼다. 남들은 무섭다며 질색을 하는 얼굴임에도 눈앞의 아이는 뺨을 발그레 붉히며 유중혁을 바라본다. 왜 저러는 거지. 유중혁의 표정이 다채로워질수록 아이의 얼굴에는 환희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유를 모르겠군. 등을 벽에 기대고 있으니 슬슬 아이가 거리를 좁혀온다.


 "뭐지?"

 "상처요. 소독 한번 더 해야할 거라."

 "금방 나을 상처다. 신경쓰지마라."


 아이는 허공에 멋쩍은 손을 휘적이다가 제 자리로 돌아간다. 아니, 돌아가려는 것을 유중혁이 잡아다가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지나치게 가벼운 몸을 한 팔로 손쉽게 잡아챈 회귀자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까지 끌어당기고 나서야 그는 팔을 놓아주었다.


 "치료는 내가 아니라 네가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어설픈 구타는 사람의 몸에 자국을 크게 남긴다고 한다. 아이의 몸에 남은 흉들이 하나 같이 그 꼴인지라 유중혁은 미간을 구기고 바닥에 놓인 구급상자를 열었다. 벗어라. 명령에 가까운 어조와 달리 유중혁은 아이가 직접 옷을 벗을 때까지 얌전히 구급상자만을 쥐었다. 벗어요? 진짜로요? 그럼 가짜일 것 같나. 아이는 쭈뼛거리다가 상의를 벗고 사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뒤로 돌라는 듯 가볍게 떨어진 손짓에도 파르르 떨어대는 몸이 천천히 등을 내보인다. 사람을 치료해보는 게 얼마만이더라. 몇 번의 회차 동안 이설화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곁눈질로 익힌 치료법들이 아이의 등 위에서 빛을 발한다. 긴장으로 가득하던 근육들이 차츰 풀려나가더니 종내에는 손길이 떨어지는 게 아쉬워 손끝에 달라붙는다. 사람 손을 타버린 애완동물은 쉽게 울어버린다던데. 보이지 않는 얼굴이 궁금해지려는 사념을 억누르고 사내가 구급상자를 닫았다. 조금 깊은 것들에만 붕대를 감아두었는데도 반쯤은 미라가 되어버린 꼴에 유중혁이 한번 더 혀를 찼다. 


 "강해지고 싶다더니. 그 생각은 전부 내던졌나?"


 몸을 일으키던 아이가 휘청였다. 유중혁은 재빨리 몸을 받아들면서도 미안하다던가 하는 말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그때 보였던 눈빛은 나쁘지 않았어서, 조금 더 나은 놈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감이 어린 표정을 가감 없이 내비추던 회귀자는 딱 5초 후에 자신의 모든 행위에 후회의 노란 딱지를 덕지덕지 붙여야만했다. 어설프게 안긴 품 안에서 아이가 울먹이기 시작한 탓이다.


 "나도 강해지고 싶어요. 강해져서, 아프지도 않고, 전부 다 이겨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나는 힘이 없단 말이에요."

 "어째서 마음껏 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의지가 있다면,"

 "나도 그 녀석들을 때려눕히고 싶어요. 하지만 살인자의 아들이니, 이런 이름을 갖고 폭력을 행사하는 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나는 너무 잘 아는 걸요. 내가 폭력을 휘두르면 그 행위가 나를 또 공격하려고 할텐데.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렇다면 계속 맞고 살 생각인가."


 아이의 훌쩍거림은 이어지던 대답들을 뭉개더니 그 질문에서만큼은 단호하게 거절의사를 표한다. 나는 강해질 거예요. 유중혁은 내심 이 아이를 길러내고 싶다는 충동에 휩쌓였다. 이지혜가 안다면 뒷목을 잡고 길길이 날뛰겠지만, 두 눈 안에 들어찬 욕심은 어쩌면 유중혁은 평생 가질 수 없는 욕망인지라 그는 이 아이가 자란 것을 보고 싶다는 갈망에 다다른다. 이미 한번 개입한 대상인데 두 번을 못할까. 유중혁은 아이의 몸을 일으키고 제 칼집에 손을 얹었다. 적당히 처리해주마. 


 "아, 아니, 하지 마세요!"


 뭐가. 그렇게 되묻는 눈에는 방금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마냥 의문이 그득하다. 사람을 죽이는 산타가 어디 있냐며 발을 동동 굴러대더니 퍽 진지하게 제 팔을 잡고 아래로 끙끙대며 끌어당기는 꼴에 유중혁은 순순히 자리에 앉아주었다. 그럼 그 산타는 욕도 하고 칼도 차고 있지만 사람은 안 죽인다는 건가. 코웃음이 홱 튀었다. 그래, 할 수 있다면 납득시켜봐라. 아니면 당장 죽이고 올테니까.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아이는 일순간 고뇌하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홱 고개를 처들었다.


 “이건 내 복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할 거예요. 나는 강해지고 싶은 거지 쟤네가 다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란 말예요.”


 그리고 죽여도 내가 죽일 거라고요. 언제 울었다는 듯 아이는 꽤나 결연한 얼굴로 팔짱을 낀다. 그걸로 충분한가. 그리 되묻고 싶었으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화를 낼 생각이 만연한 얼굴에 회귀자가 두 손을 들어보였다. 이상한 놈이다. 자신보다 강한 존재가 있음에도 무조건적으로 의탁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 더욱 구미를 당기게 만든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키워냈는지. 유중혁은 아까의 생각을 지워버린다. 이 아이는 꽤나 잘 컸다. 앞으로가 기대될 정도로.


 "그렇다면 뭘 소원으로 원하지?"

 "소원이요?"


 나보고 산타라면서. 유중혁은 진중한 낯으로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소원을 빌어봐라. 들어줄테니까.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지 그의 낯에 말간 미소가 띄워졌다. 딱, 그 어렸을 적의 얼굴을 빼닮은 모습이다. 이방인으로 규정되어 잊혀지는 공포는 눈앞의 아이로 지워지고 유중혁은 저 아이의 존재만큼 자리할 땅을 부여받는다. 이 불친절한 회귀자는 그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제 스스로 그리 납득하고 그 오밀조밀한 얼굴 위로 고민 중이라고 써붙인 아이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저씨, 밖에도 나갈 수 있어요?"

 "나갈 수야 있겠지만."


 검이라던가, 걸릴 게 많을텐데. 유중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는 방을 나가더니 길다란 천 하나를 가져왔다. 검도하는 애들이 사용하는 거라고, 제 친척 동생이 방에 박아둔 물건이라며 베싯 웃는 아이가 둘둘 말린 검보를 내민다. 천을 받아들고 진천패도를 밀어넣자 얼추 길이가 맞았다. 아이는 무어가 그리 좋은지 연신 헤실 웃으며 뿌듯한 낯을 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코트 자락을 여미고 몸을 일으키자 여전히 제 가슴께에도 오지 못하는 왜소한 키를 마주한다.


 "뭘 하고 싶은 거지."

 "혹시 아쿠아리움 좋아하세요?"


 개복치가 보고 싶어서요. 유중혁은 잠시 제 귀를 의심한다. 개복치? 그 툭하면 죽는 생선? 얘는 대체 왜 이런 취향이 있지. 아이는 진심인지 제 눈을 반짝이며 사내를 돌아본다. 추운 날에도 아이가 집어든 옷은 겨우 코트 한 벌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는 담을 쌓은 회귀자가 내비치는 표정에 아이가 입술을 비죽였다. 개복치 엄청 귀엽거든요! 물론 잘 죽기는 하겠지만. 그 때문이 아니라고 말을 해봤자 의미가 없겠지. 유중혁은 잠시 아쿠아리움에 그 취약한 생물이 살아있기는 할까 고민을 했으나 얌전히 아이를 따라가기로 했다. 이 세계에 패왕은 존재하지 않으니 일회용 산타 아저씨 역할도 나쁘지 않겠다는 안일한 마음이다.


 “아쿠아리움 티켓 살 돈도 모아뒀어요.”

 “왜 혼자 가지 않았지?”

 “…그냥요. 같이 가주시는 거죠?”


 대답을 흐리더니 자랑스레 서랍 안에서 지폐를 꺼내드는 아이를 보고 유중혁은 제 수중에 남아있는 돈을 가늠한다. 이곳의 화폐 단위도 멸망하기 이전의 세계과 동일한가. 아이의 손에 들린 지폐는 제가 기억하는 과거의 것과 같은 모양을 띈다. 회귀할 때마다 동일하게 품에 들어있는 지갑은 세월만을 따지자면 웬만한 인간보다도 더 긴 세월을 살았을 것이다. 유중혁은 처음으로 코트 안에 들어있는 지갑의 묵직함에 안도하고 지폐다발을 쥔 손을 잡아 서랍 안에 얹었다.


 “선물을 받겠다더니 돈은 왜 내는 거지.”

 “산타가 돈도 있어요?”

 “난 돈 있는 산타다.”


 아이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지폐를 놓고 눈치를 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내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안고 방을 나섰다. 좁은 집안. 온기 하나 없이 서늘한 공기가 난방조차 하지 않은 집안의 꼴을 전시한다. 몸이 차군. 유중혁의 손아귀에 슬 힘이 들어갔다. 아이는 이 추운 날씨에도 코트 하나만을 달랑 몸에 걸치고 운동화를 신었다. 코트와 스마트폰 하나가 아이의 객식구인 듯하다.


 “버스 말고 택시 잡아라.”

 “에, 택시요?”

 “버스 정류장까지 어느 세월에 가지? 얼어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 들어라.”


 유중혁은 아이의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집을 나선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주택가에서 사내가 택시를 잡고, 뒤따라 나온 아이를 바라본다. 타라. 단 한 단어에 아이가 뒷좌석에 올라탄다. 그새 벌개진 손끝을 바라보며 유중혁이 혀를 찬다.


 “가장 가까운 백화점으로 가주십쇼.”

 “에?”


 얼빵한 소리를 내는 아이를 반쯤 무시하며 택시가 눈길을 가로지른다. 그 꼴을 하고 돌아다닌다니, 감기에 걸려 죽고 싶은가. 이 정도로 사람이 죽지는 않겠지만 유중혁은 이 아이가 유약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어차피 종이조각에 불과한 돈이니 여기에서 다 쓰고 돌아가도 문제가 없다. 지난번과 같다면 기억조차 하지 못 할 일이니. 안절부절한 모습을 보이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유중혁이 눈을 감았다. 입가에 퍼지는 온기를 씹어삼키며 회귀자는 아이의 불안감을 외면한다.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익숙해질 때까지 퍼부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은 틀린 적이 없다. 그리고 유중혁은 쓸 돈이 아주 많았다.


 “이거 무거워요….”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인가.”


 아이는 목도리와 두툼한 옷으로 돌돌 말린 채 유중혁의 뒤를 따라왔다. 처음에는 몇 번 감사하다 말을 하던 아이는 슬슬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제 뒤를 따라다니며 한 겹 씩 옷을 껴입기 시작했다. 두 벌을 더 사주려다가 이걸 갖고 들어가면 그것도 문제라며 고개를 젓는 아이를 보던 사내는 역시 친척들을 전부 다 죽여버릴까 짧게 고민을 했다. 뭘 눈치챘는지 아이의 눈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마주하고 그만두었지만.


 “그런데 왜 하필 개복치지?”


 택시에서 내린 두 사람은 큼지막한 건물로 들어간다. 크리스마스답게 아쿠아리움에는 사람이 가득 뭉쳐있었다. 티켓 두 장을 끊고 하나를 아이에게 내밀자 방금까지도 떨떠름하던 얼굴이 금방 눈을 접어 웃어보인다. 아, 티켓 때문이 아닌가. 그 개복치가 그렇게 좋았는지 개복치가 뭐냐면요, 로 떨어진 운을 시작으로 아이가 빠르게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개복치 사진이라도 보여줄 셈인가. 취향이 정말 특이한데. 그래도 그 모습이 나쁘지 않아 아쿠아리움의 안으로 들어서며 연신 뒤를 힐끗였다. 아이는 제 핸드폰을 다급히 두들기더니 함박웃음을 짓고 아쿠아리움 안으로 뛰어들어와 화면을 사내의 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이라는 건데요! 진짜 재미있는 ■■이거든요!”

 “잠시만, 너, 말하지,”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터졌다. 필터링 된 무언가를 향한 시선의 앞에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상태창이 펼쳐진다. 


 [아 직은 안 된다.]


 무엇이?


 의문에 대한 답조차 주지 않고 세상은 회귀자를 추방한다.



*



 "중혁 씨, 일어나셔야 해요!"


 비명에 가까운 이설화의 목소리가 아지트 안에 울린다. 동맹이니 뭐니 하면서 좁은 주택 안으로 기어들어온 이들이 아직 나가지 않았나보다. 인연이라는 것은 이리도 질기다. 유중혁은 제가 거둬들이지 않아도 꾸역꾸역 얽혀오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몸을 급히 일으키고 진천패도를 쥐었다. 서울권 안으로 밀어닥치는 귀환자들의 격에 맞서며 회귀자가 발을 박찬다. 하나의 목이 떨어지고, 피가 난자한 전장이야말로 화신 유중혁의 무대. 습관 마냥 적을 베어내던 유중혁은 어느 순간 제 모습에 기시감이 뿌리내린 것을 인지한다. 어째서일까. 무언가를 향한 의무감이 그의 목을 죈다. 방향성을 잃은 감정이다. 유중혁은 아주 오랜 시간 만에 어떠한 절박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 갈망의 길잡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떨쳐낼 수 없을만큼 불쾌한 탓에 패왕은 학살을 시작한다. 찢어지는 캐롤 송 아래 패왕 유중혁의 검무가 시뻘건 크리스마스의 시작을 알렸다.



*



 "안녕, 산타 아저씨."

 "잘못 컸군."

 "아저씨는 점점 입이 거칠어진다?"

 "넌 싸가지가 없어졌고."


 유중혁은 편의점 테이블의 의자에서 눈을 뜬다. 이 짓도 세 번째이니 익숙해지는군. 버석한 감상평이 여전히 제 것이 아닌 세계에 떨어진다. 이제는 어엿한 청년의 꼴을 한 아이의 얼굴에는 꽤 큼지막한 반창고가 붙어있다. 아직도 맞고 사는 건가. 사내의 눈썹 끝이 휙 위로 치솟았다.


 "아, 이거. 아저씨는 이상하게 내가 맞는 시기에만 찾아오더라."

 "맞지 않는 시기가 있기는 한가?"

 "뭐 그런 걸 따지고 그래. 쩨쩨하게.“


 유중혁은 짙은 술내음을 맡는다. 이제는 술 마실 나이도 됐다는 건가. 항상 눈썹을 스치던 앞머리가 까슬하게 밀려있다. 군대? 애가 나라를 지키겠다고 설치는 꼴이로군. 캔 맥주 몇 개가 편의점 테이블 위를 나뒹군다. 유중혁은 새삼 자신이 이 세계에 떨어질 때마다 이 녀석에게 이끌려온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오히려 다른 놈이었다면 불쾌했겠지.


 “개복치는 잘 봤나?”


 여전히 유중혁은 이곳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마다 물을 찾기 시작했다. 이지혜는 사부가 원래 바다를 좋아했냐며 의문을 표했으나 유중혁 또한 아는 것이 없어 그저 발 닿는 대로 푸른 것들을 찾아 떠돌았다. 어느 날에는 개복치라는 생선을 보고 화가 치밀어 주변에 있던 어룡종을 전부 죽이고 숨을 골랐다. 유중혁은 제가 미쳐간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 어느 회차에서도 그는 미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그것을 일상으로 규정한다.


 “아쿠아리움에는 없더라.”

 “다른 곳에는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군.”

 “응, 있지. 내가 엄청 좋아하는 개복치.”


 더 이상 아이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사내의 앞에서 유중혁이 다리를 꼰다. 당신은 나이를 먹질 않네. 진짜 요정이야? 우스개소리를 하며 홀로 낄낄대던 그는 어지러운지 머리를 휘젓고 숨을 길게 뱉어냈다. 나와 같이 보자고 하던 녀석이 결국은 혼자 봤다는 건가. 그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시간에게 질투를 한다. 대충 넘겨도 5년 즈음은 넘었을 시간이 유중혁에게는 어제와도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회귀자의 삶에서 일탈이란 그런 의미이다. 눈앞의 아이를 향한 감정마저도, 그러하다. 캔 맥주 몇 개를 마시고 저 꼴이 난 걸 보면 주량마저도 약한 모양이지. 유중혁은 사내의 몸을 끌어안고 어깨에 들처맨다.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깡마르고 가벼운 몸.


 “너야말로 달라진 게 없군.”

 “달라지고 싶었는데 어렵더라. 당신도 나도 하나 같이 달라지질 않네.”

 “그래서 이 밤에 청승맞게 혼자 술이나 마시고 있는 건가.”

 “당신이 와줄 줄은 몰랐지. 매 해마다 기다렸는데 안 왔잖아.”


 설마 하긴 했어. 오늘은 눈이 왔으니까. 당신이 오는 날에는 꼭 눈이 오더라. 화이트 크리스마스. 당신이랑 진짜 안 어울리는 거 알아? 청년은 유중혁의 등 뒤에서 웃음을 터트리다가, 울상을 짓다가, 다시 또 입을 열어 한참동안 제 이야기를 한다. 유중혁은 그 모든 것을 말 없이 듣고 음미한다. 이런 주사를 갖고 뭘 하겠다는 건지. 유중혁은 한참을 걷다가 발을 멈췄다. 아, 이곳은 그의 세계가 아니지. 반복되는 캐롤 송을 들으며 우뚝 선 다리 뒤에서 청년이 방향을 지시한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가면 돼.”


 유중혁은 묵묵히 다리를 움직인다. 이번에는 산타가 아니라 루돌프야? 아직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청년이 어깨 위에서 웃음을 마구 터트린다. 어디로 가는 거지. 유중혁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목적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저기를 끼고 돌면 돼. 여기서는 오른쪽으로. 있지, 우리 같이 보자고 했잖아. 한참 길을 걷다 스쳐간 시계에서는 11시를 가리키며 그들에게 인사를 남긴다. 무엇을 말인가. 뭐겠어. 시덥잖은 사담이 오가고, 유중혁은 청년을 내려놓았다.


 “아쿠아리움. 당신이랑 보러 가기로 했잖아.”


 입을 꽉 다문 아쿠아리움의 벽을 따라 청년이 걷기 시작한다. 나, 여기에서 알바를 했거든. 당신이 오질 않으니 어쩔 수 없잖아. 유중혁은 그런가, 하고 짧은 감상만을 내려놓는다. 이쪽으로. 걸리면 우리 쫓겨날 걸. 유중혁은 누군가에게 모습을 숨기는 일에는 도가 텄으므로 그의 말에 코웃음을 친다. 기절시키면 그만이다. 유중혁은 자신의 사고가 어딘가 고장나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키득이며 큰 소리로 웃으려는 것을 겨우 참아내는 청년 탓이다.


 “여기야.”


 불은 켜지 못하겠지만. 청년의 스마트폰 불빛을 이정표 따라 두 인영이 물속에 몸을 묻는다. 유중혁은 이 광경이 어룡종을 사냥하기 위해 들어갔던 한강의 바닥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눈앞의 청년이 그 공간과 참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 또한 하고 말았다. 수영은 할 줄 아나 모르겠군. 몸을 대충 훑어도 운동을 잘 할 사람의 몸은 전혀 아닌지라 얌전히 기대를 접고 어느새 저만치 걸어가는 이의 뒤를 좇았다.


 “개복치가 없다면 의미가 없는 거 아니었나.”

 “뭐가 됐든 나랑 보러 가주겠다고 했으니까. 왜, 싫어?”

 “산타한테 바라는 선물이 너무 초라한데.”


 청년은 마구 웃으며 유리벽을 짚었다. 모든 생물이 잠든 공간에서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간다. 이봐요 산타 씨, 당신이 왜 산타인지를 모른단 말야? 유중혁은 몰이해에 묻혔다. 내가 네게 싸우는 법을 알려줬으니까? 그가 고개를 젓는다. 옷을 사줘서?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심지어는 헛웃음을 짓고 고개를 젓는 모습에 사내가 미간을 찌푸린다. 나와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소리인가. 나는 죽으려고 했어. 혹은 죽을 뻔했거나. 어설프게 원하는 걸로는 안 되더라. 큼지막한 물고기가 만든 그림자가 걷혀가고, 유중혁은 그가 서 있는 곳만이 빛난다는 착각을 한다. 마치 그가 저와 다른 공간에 속해있다는 것을 알리듯 모든 것이 그 둘을 구분 짓는다.


 “오늘은 날이 춥잖아. 죽지 못할 이유야 있었지. 그런데 죽지 못할 이유도 없었단 말야. 보고 싶은 끝이 있어서 버티고는 있는데 아무리 익숙한 일이어도 왜 고통은 익숙해지질 않을까.”

 “내가 죽여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내 복수가 아니라고도 말했지.”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 당신이 그 말을 해주면 등 뒤가 든든했거든. 내 영웅은 환상이지만 당신은 내 현실이니까. 하룻밤뿐인 현실이라도 현실은 현실이잖아. 당신이 내게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었으니까.

 

 한 발자국. 유중혁은 그만큼 다가선다. 그리고 한 발자국. 딱 그만큼 청년이 뒤로 물러났다.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유중혁이 답답함을 느낀다. 도망을 간다는 감각을 버릴 수 없다. 여기까지 와서 무엇을 감추고 있지. 내가 너를 살렸다면 내게 네 생존을 증명해라. 사내는 여즉 명령조로 말을 뱉어낸다. ■■■는 문득 그의 말에 불안감이 서려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쓰읍, 표정 봐봐. 사람 하나 죽이겠네. 나는 안 죽을 거야. 당신이 그걸 막아주었으니까.”


 아쿠아리움의 가장 깊은 곳. 출구를 가리키는 푯말 앞에서 그가 몸을 돌린다. 여전히 내 이름은 못 들어? 아마도. 들어볼래? 그랬다가 사라지면 어쩔 셈이지. 다음번에 또 보면 되잖아. 몇 년이 걸릴 줄 알고. 나는 기다릴 자신이 있는데. 당신은 없어? 유중혁은 단호하게 말을 뱉어낸다. 그래, 없다. 나는 없어. 그러니 이리 와라.


 “있지, 산타 씨. 다음번에 오면 얼굴 보여주지 않을래?”

 “얼굴이라면 지금도,”

 “엄청 흐릿해. 보이질 않아. 엄청 잘생겼을 거 같은데. 그러니까 다음번에는 보여줘.”


 툭. 군살 하나 없는 손이 푯말을 떠민다. 청년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는지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나중에 봐, ■■■. 유중혁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의 입술을 노려봤다. 유, 그리고?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 일회용 산타클로스가 소리를 질렀다. 다시 만날 수 있느냐고.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사라진다.



*



 짧은 탄식과 함께 회귀자가 눈을 떴다. 괜스레 뻑뻑한 눈가를 부벼대며 그가 몸을 일으킨다. 문밖이 소란스럽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누군가가 벌컥 문을 열어젖힌다.


 "뭐야, 왜 아저씨 방에서 사부가 자고 있어?"


 우리엘의 후원 메세지를 무시하며 침대 옆을 더듬자 이미 자리를 떠난 온기가 서늘한 기온만을 내비춘다. 김독자. 어딜 가서 또 뭘 하는 거지. 이지혜에게 나가보라며 손짓을 하고 옷을 꿰어입자 다시 한 번 아래에서 큰 소리가 났다. 지직거리는 기계음이 이어지고 온 복도에 모닝콜 비스무리한 캐롤송이 울려퍼진다.


 "사부, 빨리-!"


 이지혜의 재촉에 검을 들고 방문을 나선다. 한파니 어쩌니 하는 겨울바람이 매섭다. 그럼에도 그를 기다리는 이들의 목소리가 복도를 메운다. 칼을 바르게 차고 유중혁이 문을 닫았다. 대답 대신 훌쩍 계단을 뛰어내리며 몸에 속도를 싣는다. 그의 동료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파직, 파지직

     

 텅 비어버린 자리에 희미한 스파크와 함께 시나리오 창 하나가 떠오른다. 봐줄 이 하나 없는 외로운 사각 창은 거리의 캐롤송과 함께 나타났다가 다시 투명해지기를 반복한다.


 [히든 시나리오 - 착한 아이]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성좌, '■■■ ■■'에게 ■■살의 크리스마스를 선사하시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화신, '■■■'의 기억

 실패 : 화신, '■■■'의 기억 소멸


 "안 오고 뭐 해, 유중혁."

     

 흰 코트가 사내를 바라보며 나선을 그린다. 유중혁은 대꾸 없이 그를 향해 다가간다. 사내의 팔과 다리에는 이미 아이들이 매달려 선물을 조르고 있다. 응, 응. 알겠어. 뭐가 좋은데? 나? 난 못 주지. 사람은 선물이 아냐. 아이들을 달래면서도 입꼬리에는 웃음이 걸려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라도 될 생각인가, 김독자."

 "뭐가 불만이야. 너도 선물 줄까?“

 

 네 선물 따위는 필요 없다며 고개를 돌리는 파트너를 향해 김독자가 손을 내밀었다. 새끼, 까칠하게 굴기는. 머쓱하게 허공을 휘저은 손을 유중혁이 한 박자 늦게 잡아낸다. 너희 연애하냐며 아우성을 치는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허연 눈송이들에게 향한다. 무너진 서울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김독자가 시간선의 너머로 보여준 그 어느 회차보다도 북적거리는 인원들이 모여앉아 저들만의 크리스마스를 재잘댄다.

     

 “아, 맞다. 중혁아."

 "무슨 소리를 하려고-,"

 "메리 크리스마스.”

     

 [히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했습니다.]

     

 유중혁은 입을 조금 벌리고 김독자를 바라봤다. 훅 들어온 인사. 이어 떠오른 짧은 알림창과 함께 유중혁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쏟아졌다. 유중혁의 것이나 자신의 것이 아닌 3번의 성탄절. 그리고 12월 25일. 유중혁은 얼굴을 구긴다. 불쾌감에 숨이 턱 막혀온다. 그는 이 선물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저, 자신의 별이 ‘유중혁’의 손에 의해 하늘로 떠올랐다는 것이 불쾌하고 동시에 만족스러워 도망가는 등을 바라보고 코웃음을 쳤다. 중혁아, 뭐가 문제야! 유중혁은 달려나가며 인사 하나를 웅얼댔다. 메리 크리스마스. 사내는 이러한 인사가 더 이상 불쾌하지 않다는 것을 끝내 인정하고 만다. 여전히 어색한 북적임도, 누군가의 온기와 애정도 제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느끼면서도 유중혁은 생애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유일한 타협점에 다다랐다.


 김독자가 그러한 삶을 바라며 살아왔다면, 과거가 유중혁에 의해 유지되었다면 남은 미래를 지켜나가는 것은 저의 몫이라고.


 유중혁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세계에 정착한다. 어울리지 않다 한들 유중혁에게는 이 세계를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고요함은 자신과 누군가의 일상이었으나 이런 소란도 나쁘지 않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여섯 개의 이야기가 그의 머릿속에서 엉켜든다. 더는 얼굴이 흐릿하지 않은 두 인물이 서로를 마주했다. 기적. 혹은 누군가의 장난. 이성을 벗어난 이야기를 두고 유중혁은 단어 하나를 꺼내들었다. 김독자가 유중혁의 손에 의해 28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것처럼, 유중혁 또한 김독자의 손에 의해 32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스타스트림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둘 만의 서사가 함박눈과 함께 3회차를 찾아온 날.

     

 고요하지 않은 밤.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 얻은 생존의 서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