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tence Addiction






 옅은 빛줄기가 창을 투과해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얼굴을 간질이는 그 따스함에,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파들거리며 떠졌다. 잠에 취해 몽롱한 두 눈이 느리게 주변을 살폈다. 시계 초침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 안은 고요한 침묵이 흘러 이질적이게만 보였다. 유중혁은 그 적막감을 견디지 못해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넓은 공간이 무색하게도 단출한 가구 두 어 개로만 채워져 있는 곳은 분명 그의 오피스텔이었다. 기억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유중혁은 침대에서 벗어나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내려앉음과 동시에 서늘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현실감이 덮쳐오기 마련이건만, 한기가 발바닥부터 시작해 발목을 타고 올랐음에도 이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


 그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순식간에 어두웠던 내부가 밝아지며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곧장 창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때렸다. 유중혁은 무심히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서울 특유의 질 나쁜 공기와 함께 정신없는 일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 비현실감은 대체 무엇인가.


 유중혁은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침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 위에 달라붙었으나 꿈을 꾸듯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지구 한복판을 통과해 다른 세상에 툭 떨어지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그래, 마치 다른 세상에 툭 떨어진 것 같은 이질감이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바로 하고 창문을 닫았다.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유리창에 얼굴이 비치며 뺨의 흉터가 드러났다. 마치 무언가에 베인 것 같은 자국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이었다.


 ‘중혁아.’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눈을 감자 흐릿한 인영이 떠오르며 유중혁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 인영을 본 유중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상념과 함께 감정의 파도가 인다. 동시에 드는 아릿한 두통에 유중혁은 그만 사고를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털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동생인 유미아나 동료 프로게이머들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유중혁은 메시지를 읽어 내린 후 답도 하지 않은 채 화면을 꺼버렸다.


 그는 그 길로 휴대폰을 내팽개친 후 욕실로 향했다.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었음에도 몽롱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이 이질감이 무엇이냐며 스스로에게 자문했지만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유중혁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며 의미 없이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어느새 오전 9시를 훌쩍 넘어있었다.


 딱히 갈 곳도 없건만 몸은 충실히 외출 준비를 했다. 유중혁은 언제나처럼 검은 외투를 꺼내드려다 멈칫했다. 옷장에 흰 코트가 걸려있었다. 그는 홀린 듯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의 것이 아니었다.


 ‘유중혁.’


 또다. 유중혁은 제 이마를 붙잡았다. 찌푸려진 제 미간을 누른 후 눈을 깜빡이자 두통이 가라앉는 듯 했다. 그는 흰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이 알 수 없는 이질감과 관련 있을 지도 몰랐다. 유중혁은 흰 코트를 걸쳤다. 마치 제 것인 것처럼 몸에 꼭 맞았다. 달갑지 않았다.


 그는 신발을 신고 현관에 섰다. 매일 지나간 문임에도 역시나 낯설게 느껴졌다.


 …밖을 살피면 원인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유중혁은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막상 밖으로 나왔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질감은 해소되기는커녕 더 극대화되었으며, 오히려 비현실감이 그를 덮쳤다. 많은 사람이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특별할 게 없는 그런 일상을 말이다. 유중혁은 그 평화로운 일상에서 홀로 동떨어진 채 괴리감을 느꼈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오피스텔 근처의 공원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으며,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유중혁은 낯선 눈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평일임에도 공원은 한산하기는커녕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 한가로움에 어울려 늘어지기도 하련만, 유중혁은 공원을 거닐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나타나 제 뒷덜미를 물고, 흉기로 가슴을 찌를 것 같은 긴장감이었다. 대낮 한복판에서 이런 상상이라니, 과대망상이라 손가락질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한참 공원을 거닐다 한 벤치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 흰 코트가 휘날렸다. 유중혁은 시선을 내려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


 분명 제 옷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당연하듯 이 옷을 걸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상념에 빠져 눈을 가늘게 뜨자 무언가가 통통거리며 발치로 굴러왔다. 작은 공이 마치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그의 발 주변을 맴돌았다. 유중혁은 허리를 숙여 공을 집어 들었다. 곧 처음 보는 아이가 중혁의 앞에 서 멀거니 공을 올려다보았다. 그 애 타는 시선에, 유중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것인가?”


 아이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혁이 공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한달음에 공을 가져갔다. 그는 다시 공을 튀기며 저만치로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며 멀어져 갔다. 


 분명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이 모든 게 비일상으로 느껴지는 걸까.


 그 순간 유중혁은 깨닫고 말았다. 지구 반대편으로 툭 떨어진 것처럼, 아침부터 계속 느껴지던 이 이질감은 그가 이 일상에 동화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걸.


 그토록 바라던 평화다. 그에게는 구원이었다. 하지만 낯설었다.‘그 세계’처럼 ‘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유중혁은 순간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째서 구원을 바랐나. 그는 대체 누군가. 그 순간 마치 귀가 먼 것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


 중혁은 눈을 크게 떴다. 물이 솟아오르던 분수의 물줄기는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멈추어 있었으며, 아이가 찬 공은 실에 매단 것처럼 공중에 달려있었다. 유중혁은 서둘러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상이 멈춰있었다. 벤치에서 한 발자국 걸음을 떼는 순간, 흰 코트자락이 마치 환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를 본 순간 홀린 것처럼 손이 절로 앞으로 뻗어진다. 하지만 끝내 닿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놓치고 말았다.


 그 순간, 유중혁은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김독자.


 제 안의 무언가가 그렇게 말했다. 중혁은 뜀박질에 박차를 가하며 있는 힘껏 팔을 내뻗었다. 어느새 깨끗했던 손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흰 코트와 옷은 군데군데가 찢겨 맨 살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손을 거둘 수 없었다. 절대 그를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지금 놓쳐버리면 이곳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를 찾기 위해서라도 벗어나야 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내달렸을 무렵, 중혁은 남자의 어깨를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어느새 흰 코트는 찢기고 더럽혀져 있었다.


 “김독자.”


 유중혁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 분명 그의 이름이었다.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우자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이 그를 향했다. 그 얼굴을 마주했다고 생각했을 때, 중혁은 김독자의 몸을 끌어안은 채였다.


 “김독자.”


 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대신 마주 안아올 뿐이었다. 유중혁은 그 머리카락 속에 제 고개를 묻으며 이를 악물었다. 주변을 채웠던 이질감이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환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순간, 주변을 채웠던 풍경이 수많은 활자로 변모해 흩어져갔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볼을 감싸 그대로 입맞춤을 내렸다.


 “난 끝에 도달할 거다.”


 그리고 널 찾을 것이다.


 그 말에 김독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다 이내 눈을 곱게 접곤, 부드럽게 입을 맞춰왔다. 유중혁은 으스러지듯이 제 품 안의 남자를 끌어안았다. 품 안의 남자가 흩어짐과 동시에 주변으로 활자가 날아올랐다. 유중혁은 본능적으로 지금이 환상의 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분명 그토록 바라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무의미했다. 그는 흰 코트를 걸친 채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다시 원래의 지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바라던 이야기의 끝을 보기 위해서.












 김독자는 희망, 절망, 그리움, 애틋함과 절박함 따위의 감정이 얼룩덜룩 뒤섞여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의 비통함이 형상화된 것을 목도했다.


 유중혁은 막 신유승의 증언을 접한 참이었다. 그녀는 우두커니 극장 한가운데에 앉아 유중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영이 끝난 스크린은 더 이상 환하게 빛나지 않았으나 신유승은 어떤 관람객보다도 신중하게 인내를 감안했다.


 반년 만에 내 딸을 만났네. 한명오는 기이하기 짝이 없던 재회를 증언했다. 한순간 쓰러지는 게 아닐까 동정이 일 정도로 초췌한 몰골이면서 간밤의 일을 설명하는 목소리에는 뚜렷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김독자는 그의 딸을 상기했다. 그 일로부터 일 년이나 지나버린 탓에 저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동료들을 뒤로 하고 앳된 얼굴의 아이를 떠올리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경험과 감정의 부산물로 우르르 쏟아지는 기억 속에서 그는 용케 찾아내려던 것을 가까스로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빠르게 감기는 영상처럼 펼쳐진 한 장면이 머릿속 한 켠에 그의 딸의 모습을 재생시켰다. 그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딸을 만났다고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심이라기보다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는 재확인에 가까웠다. 그의 반응에 한명오는 말없이 자신의 빈 잔을 채웠다.


 저는 오늘 분명하게 아저씨를 만났어요. 신유승은 울거나 슬퍼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라곤 없이 담담한 어조로 찰나의 재회를 재현했다. 저는 아스모데우스, 아니 그 아이에게서 이 극장에 대한 소문을 알게 되었어요. 그 아이가 이곳에서 한명오 아저씨를 만났다고 알려주었는데,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심야의 극장에서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니. 시나리오도 없어지고 세상이 완전히 분리된 지금 세상에, 터무니없는 이야기잖아요. 저는 그 말을 잠시 묻어두었어요. 묻어두고는 독자 아저씨가 당장 너무 보고 싶어서 우울해지려고 할 때마다 통에서 사탕을 한 알씩 꺼내먹듯 그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기침 같은 호흡이 잠시 메인 목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저도 몰랐는데, 제가 제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허구 같은 소리라도 혹시, 라던가 설마, 하는 단어에 기대고 싶어지더라고요. 마침 이곳에 올 때 저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어요. 희원 언니가 퇴근하는 시간이라 같이 귀가를 하려고 했죠. 영화관이 있는 백화점 앞에서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득 저는 그 생각이 났어요. 그녀는 명료한 어조로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했다.


 김독자가 한명오와 단둘이 저녁을 함께 하는 건 장담컨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쩍 늙은 듯한 얼굴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대신 술 한 잔을 비우기에 김독자는 그의 앞에서 아직 반쯤 남은 소주병을 치웠다. 한명오는 그곳에서 자신이 거쳐온 모든 행적을 관람하였다고 말했다. 자신의 딸이 거쳐온 이야기들 또한 한 편의 영화처럼 응시하였다고 말했다.


 무언가에 홀렸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영화관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이미 탑승한 뒤였고, 엘리베이터는 저를 극장 앞에 내려주었어요. 신유승은 이어 자신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 빈 상영관에 들어선 것을, 아무도 자신을 잡지 않았던 것을,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겪었던 무수한 일이 상영되던 것과 이어 모든 상영이 끝난 후 찰나, 보고 싶었던 이를 만났다고 울먹였다.


 처음, 그는 한명오의 증언을 믿지 않았다. 그의 말은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허구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허나 현실성이 없음에도 그가 뱉는 문장들은 단순히 망상이나 허상 따위로 치부하기엔 실제 겪었던 일을 설명하는 듯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고 그의 말을 들으며 김독자는 제 가슴 속에 혹시, 하는 기대감이 샘솟는 걸 느꼈다. 한명오는 거짓말이 아니라며 당시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시각과 어느 영화관의 몇 상영관이었는지까지 생생하게 언급했다. 그는 깊게 고민에 빠졌다. 조금이라도 더 신중해지고자 그럴 리가 없다고 덧붙여보았지만 이내 아니, 가능한가? 막연한 개연성을 끼워 맞추고자 부산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추론을 꺼내 보았다.


 극장을 벗어나며 신유승은 보고 싶은 이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유중혁은 신유승의 소망을 갈무리하여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불 꺼진 상영관의 앞에 서서 자신이 들은 말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홀린 듯 극장에 들어서면, 그간의 이야기를 볼 수 있어요. 영화가 모두 끝난 후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면, 찰나 그 사람과 짧게나마 만날 수가 있대요. 상호동시에 서로를 떠올려야 하는 조건인진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잠깐의 대화 역시 가능하단 거예요. 유중혁은 그녀의 목소리가 한참 동안 제 뇌 내를 맴도는 걸 느꼈다.


 허언 같던 한명오의 이야기는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김독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된 자신의 아이를 마주하였음에 한동안 극장을 떠나지 못했다. 신유승은 머리가 조금 길었다. 앳된 얼굴은 아주 조금 미세하게 성장한 것 같았다. 서로의 옆자리. 자신을 돌아보곤 놀란 눈으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저씨가 보고 싶었어요.” 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금 이별했다. 그는 건너편 세상의 사람들을 정성스럽게 상기했다. 정희원과 이현성과 이지혜와 신유승을, 그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것에 헛구역질이 들 만큼 허전하게 만드는 그를. 숙성된 그리움에 폐부가 아플 만큼 먹먹한 그를.


 유중혁은 우두커니 서서 그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이내 무언가에 이끌리듯, 조금 빠를지도 모르는 걸음으로 상영관에 입장했다.


 하여 김독자는 두 번째 가능성을 믿으며 다시금 극장 내부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중혁은 그곳에서 옅고도 낯익은 공기를 깨달았다.


 김독자는 그곳에서 익숙하고 서늘한 공기를 깨달았다.


 심야를 넘긴 마지막 상영 시간이기에 내부에는 오직 그 뿐이었다. 그는 스크린이 가장 잘 보이는 가장 뒤편 중앙에 앉아 상영을 기다렸다.


 심야를 넘긴 마지막 상영 시간이기에 내부에는 오직 그 뿐이었다. 그는 스크린이 가장 잘 보이는 가장 뒤편 중앙에 앉아 상영을 기다렸다.


 불이 꺼지고, 스크린은 유일한 관람객을 위하여 이 단 하나의 이야기를 넓고 좁은 방 가득히 한껏 토해냈다.


 불이 꺼지고, 스크린은 유일한 관람객을 위하여 이 단 하나의 이야기를 넓고 좁은 방 가득히 한껏 토해냈다.


 망막에 비치는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는 잠자코 재회의 순간을 기다렸다.


 망막에 비치는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는 잠자코 재회의 순간을 기다렸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스크린이 극장 중앙 좌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그를 비추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옆에 있을 그를 돌아보았으나 텅 빈 자리만이 각막 속에 이식되어 한탄처럼 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만히, 불 꺼진 극장 안에 앉아 어두컴컴한 칠흑 속에서 어쩌면 함께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시선의 희미한 온기를 느껴보았다. 다시 불이 켜진다. 퇴장을 앞둔 그 시간에 그는 비로소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특별히 달라지지 않은, 그러나 자신의 부재 속에서 조금 변한 것처럼 전해지는 그를 응시하다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스크린이 극장 중앙 좌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그를 비추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옆에 있을 그를 돌아보았으나 텅 빈 자리만이 각막 속에 이식되어 한탄처럼 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만히, 불 꺼진 극장 안에 앉아 어두컴컴한 칠흑 속에서 어쩌면 함께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시선의 희미한 온기를 느껴보았다. 다시 불이 켜진다. 퇴장을 앞둔 그 시간에 그는 비로소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특별히 달라지지 않은, 그러나 자신의 부재 속에서 조금 변한 것처럼 전해지는 그를 응시하다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났음에도 서로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분리된 세상을 살아간대도 끝없이 서로를 갈구하여 재회를 염원한다는 것을. 그는 그에게 자신의 일 년을 들려주었고 그는 짧은 순간 오직 그의 손만을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기다려. 내가 곧 널 만나러 갈 테니.

 그곳에서 기다려라. 네가 오지 않아도 널 데리러 갈 테니.


 이윽고 그들은 이전과 같이, 헤어지던 그날처럼 담담하고도 깊은 감정만을 남겨둔 채 퇴실했다.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어찌 보면 상당히 뻔한 이야기였다. 김독자의 삶에서 가장 큰 버팀목이었던 것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멸살법이었고 유중혁이었다. 그렇기에 그 존재가 실재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벼락 맞은 것 같다거나 심장이 크게 뛰는 그런 자각은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아, 내가 결국 이 자식을 사랑하는구나.’ 정도의 자각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너무 늦게 자각하였다는 것이다. 어차피 ■■에 가까워져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안일하게 생각했다.


 마지막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날 테니, 그 후에 말을 하자고. 사망플래그 같은 생각이었지만, 뭐 어떠랴 싶었다. 이것은 현실이고 그런 전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실제로 내가 그리던 ■■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암전. 의식이 끊겼고 눈을 떴을 때는.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없다. 그렇지만 존재했다. 그런 곳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곳이야 말로 끝이자 영원이었다. 무엇이, 어떤 존재가 개입한 것인지 생각해도 마땅한 성좌도, 성운도, 그 무엇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존재가 무엇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무엇이든 해야 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스킬을 사용하려 해도 사용할 수 없었다. 간접 메시지도 들리지 않았다. 한낮의 밀회를 사용하는 것도, 격을 방출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면 말을 걸어오는 제 4의 벽도 조용했다. 몸에 걸친 코트조차 평범한 코트로 변해있었다. 소리를 질러도, 손을 내질러도, 발을 내딛어도, 그 끝에 닿는 것은 없었다. 그저 존재하고, 나도 존재할 뿐이었다.


 망연한 끝과 영원을 바라보며,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직 포기하기는 일렀다.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상황파악은 겉핥기 수준이다. 사고를 정리해보자. 이런 곳에 있음에도 침착할 수 있다는 것은 제 4의 벽이 아직 기능한다는 의미겠지. 그렇다면. 둥근 금속을 매만지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둥근 금속이라니. 이 코트는 그 기능을 잃었으니,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야 했다. 그렇다면 손끝에 닿는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주머니에서 둥근 금속을 꺼냈다. 익숙하지만 낯선 물건이었다. 


 회중시계. 유중혁의 회중시계였다. 


 내가 직접 이것을 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제작을 의뢰했고, 전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래도록 유중혁이 갖고 있던 것이니까. 그러니까 익숙하지만 낯선 것이다. 어째서 이 시계는 남아있는 건지. 이 시계가 무언가 열쇠가 되지 않을까.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시계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이유가 뭐였더라. 그래, 유중혁이 직접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더라. 


 “시계가 멈췄다.”


 뜬금없이 와서는 시계가 멈추었다고 말했다. 나는 시계 수리공도 아닌데.


 “네가 준 것이니 네가 해결해라.”


 그렇게 말하며 떠넘겼었다. 그리고 제 할 말만 하고는 뒤돌아 가버렸었지.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네.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아일린씨에게 수리를 맡겨달라는 것인가.


 시곗바늘은 멈춰있었다. 유중혁이 내게 떠넘겼던 그대로 시곗바늘은 굳어 있었다. 


6시 59분.


 잊지 못할 시간, 그 직전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손에 있는 것은 이 시계가 유일하다. 시계를 살펴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시계를 열었다. 그리고 그 내부는 내 예상과는 크게 달랐다. 톱니장치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그 톱니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제야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이 시계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 시계를 고친다면 해결될 일이겠지. 시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 이 시계를 넘긴 유중혁에 대한 원망을 담아 톱니를 쏟아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톱니가 흩어져 부유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본 틀은 멀쩡했으니 배치만 잘 하면 되겠지.


 톱니의 위치를 찾는 일은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의외로 시계공의 재능이 있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맞는 위치를 찾을 때마다 시계가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유중혁의 상념을 뱉어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시계를 준 이후의 기록들이 여기에 남아있었다. 


 -이지혜가 무리를 한다.

 -신유승이 이상한 개구리를 주워서는 김독자라고 한다.


 한낮의 밀회에 남겼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내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독자.

 -김독자, ■■■■.

 -■■■■.


 지금까지 뱉어내던 것과 달리 이상한 노이즈가 섞여있었다. 내 욕이라도 한 건가. 나가면 한 마디 해야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지나한 작업을 이어나갔다. 


 몇 시간인지, 며칠인지,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줄어든 톱니 수를 보아하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이제는 뱉어내는 상념도 꽤나 최근의 것이다. 

 

 -위험하다.

 -아마, 견디지 못할 것이다.

 -대신 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우선, 이곳과는 아예 다른 곳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

 -.......

 -너는 살아야 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부러였다. 의도했던 것이다. 화가 나는 것인지, 슬픈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빨리 이곳을 나가 그 자식 얼굴을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위험하면 저는 안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는 견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건가. 마음이 조급했다. 그럴수록 손은 뻣뻣해졌다. 이래서는 속도가 더뎌질 뿐이다. 깊게 숨을 들이 쉬고 내뱉었다. 침착하자. 얼마 남지 않았다.


 -너는.

 -김독자, 너는.

 -나는 너를.


 시계는 계속해서 짧은 상념들을 뱉었다.


 -너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게 있어서는 

 -네가 유일했기에.

 -이런 말을.


 마지막이다. 


 -사랑한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시계를 닫았다. 그리고 째깍 소리와 함께 시곗바늘이 돌았다.


7시.


 동시에 이 장소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시계 또한 부서지기 시작했다.


 유중혁.


 너는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주었구나. 드디어 손바닥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제, 시간의 꽃잎을 날린다.


 네 시간과 내 시간이 겹쳤던 그 시간에, 나는 다시 돌아간다. 그간의 감정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