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28. 01:47
옅은 빛줄기가 창을 투과해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얼굴을 간질이는 그 따스함에,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파들거리며 떠졌다. 잠에 취해 몽롱한 두 눈이 느리게 주변을 살폈다. 시계 초침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 안은 고요한 침묵이 흘러 이질적이게만 보였다. 유중혁은 그 적막감을 견디지 못해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넓은 공간이 무색하게도 단출한 가구 두 어 개로만 채워져 있는 곳은 분명 그의 오피스텔이었다. 기억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유중혁은 침대에서 벗어나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내려앉음과 동시에 서늘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현실감이 덮쳐오기 마련이건만, 한기가 발바닥부터 시작해 발목을 타고 올랐음에도 이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
그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순식간에 어두웠던 내부가 밝아지며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곧장 창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때렸다. 유중혁은 무심히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서울 특유의 질 나쁜 공기와 함께 정신없는 일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 비현실감은 대체 무엇인가.
유중혁은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침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 위에 달라붙었으나 꿈을 꾸듯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지구 한복판을 통과해 다른 세상에 툭 떨어지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그래, 마치 다른 세상에 툭 떨어진 것 같은 이질감이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바로 하고 창문을 닫았다.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유리창에 얼굴이 비치며 뺨의 흉터가 드러났다. 마치 무언가에 베인 것 같은 자국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이었다.
‘중혁아.’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눈을 감자 흐릿한 인영이 떠오르며 유중혁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 인영을 본 유중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상념과 함께 감정의 파도가 인다. 동시에 드는 아릿한 두통에 유중혁은 그만 사고를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털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동생인 유미아나 동료 프로게이머들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유중혁은 메시지를 읽어 내린 후 답도 하지 않은 채 화면을 꺼버렸다.
그는 그 길로 휴대폰을 내팽개친 후 욕실로 향했다.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었음에도 몽롱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이 이질감이 무엇이냐며 스스로에게 자문했지만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유중혁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며 의미 없이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어느새 오전 9시를 훌쩍 넘어있었다.
딱히 갈 곳도 없건만 몸은 충실히 외출 준비를 했다. 유중혁은 언제나처럼 검은 외투를 꺼내드려다 멈칫했다. 옷장에 흰 코트가 걸려있었다. 그는 홀린 듯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의 것이 아니었다.
‘유중혁.’
또다. 유중혁은 제 이마를 붙잡았다. 찌푸려진 제 미간을 누른 후 눈을 깜빡이자 두통이 가라앉는 듯 했다. 그는 흰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이 알 수 없는 이질감과 관련 있을 지도 몰랐다. 유중혁은 흰 코트를 걸쳤다. 마치 제 것인 것처럼 몸에 꼭 맞았다. 달갑지 않았다.
그는 신발을 신고 현관에 섰다. 매일 지나간 문임에도 역시나 낯설게 느껴졌다.
…밖을 살피면 원인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유중혁은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막상 밖으로 나왔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질감은 해소되기는커녕 더 극대화되었으며, 오히려 비현실감이 그를 덮쳤다. 많은 사람이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특별할 게 없는 그런 일상을 말이다. 유중혁은 그 평화로운 일상에서 홀로 동떨어진 채 괴리감을 느꼈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오피스텔 근처의 공원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으며,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유중혁은 낯선 눈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평일임에도 공원은 한산하기는커녕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 한가로움에 어울려 늘어지기도 하련만, 유중혁은 공원을 거닐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나타나 제 뒷덜미를 물고, 흉기로 가슴을 찌를 것 같은 긴장감이었다. 대낮 한복판에서 이런 상상이라니, 과대망상이라 손가락질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한참 공원을 거닐다 한 벤치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 흰 코트가 휘날렸다. 유중혁은 시선을 내려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
분명 제 옷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당연하듯 이 옷을 걸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상념에 빠져 눈을 가늘게 뜨자 무언가가 통통거리며 발치로 굴러왔다. 작은 공이 마치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그의 발 주변을 맴돌았다. 유중혁은 허리를 숙여 공을 집어 들었다. 곧 처음 보는 아이가 중혁의 앞에 서 멀거니 공을 올려다보았다. 그 애 타는 시선에, 유중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것인가?”
아이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혁이 공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한달음에 공을 가져갔다. 그는 다시 공을 튀기며 저만치로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며 멀어져 갔다.
분명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이 모든 게 비일상으로 느껴지는 걸까.
그 순간 유중혁은 깨닫고 말았다. 지구 반대편으로 툭 떨어진 것처럼, 아침부터 계속 느껴지던 이 이질감은 그가 이 일상에 동화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걸.
그토록 바라던 평화다. 그에게는 구원이었다. 하지만 낯설었다.‘그 세계’처럼 ‘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유중혁은 순간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째서 구원을 바랐나. 그는 대체 누군가. 그 순간 마치 귀가 먼 것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
중혁은 눈을 크게 떴다. 물이 솟아오르던 분수의 물줄기는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멈추어 있었으며, 아이가 찬 공은 실에 매단 것처럼 공중에 달려있었다. 유중혁은 서둘러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상이 멈춰있었다. 벤치에서 한 발자국 걸음을 떼는 순간, 흰 코트자락이 마치 환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를 본 순간 홀린 것처럼 손이 절로 앞으로 뻗어진다. 하지만 끝내 닿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놓치고 말았다.
그 순간, 유중혁은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김독자.
제 안의 무언가가 그렇게 말했다. 중혁은 뜀박질에 박차를 가하며 있는 힘껏 팔을 내뻗었다. 어느새 깨끗했던 손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흰 코트와 옷은 군데군데가 찢겨 맨 살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손을 거둘 수 없었다. 절대 그를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지금 놓쳐버리면 이곳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를 찾기 위해서라도 벗어나야 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내달렸을 무렵, 중혁은 남자의 어깨를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어느새 흰 코트는 찢기고 더럽혀져 있었다.
“김독자.”
유중혁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 분명 그의 이름이었다.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우자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이 그를 향했다. 그 얼굴을 마주했다고 생각했을 때, 중혁은 김독자의 몸을 끌어안은 채였다.
“김독자.”
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대신 마주 안아올 뿐이었다. 유중혁은 그 머리카락 속에 제 고개를 묻으며 이를 악물었다. 주변을 채웠던 이질감이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환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순간, 주변을 채웠던 풍경이 수많은 활자로 변모해 흩어져갔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볼을 감싸 그대로 입맞춤을 내렸다.
“난 끝에 도달할 거다.”
그리고 널 찾을 것이다.
그 말에 김독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다 이내 눈을 곱게 접곤, 부드럽게 입을 맞춰왔다. 유중혁은 으스러지듯이 제 품 안의 남자를 끌어안았다. 품 안의 남자가 흩어짐과 동시에 주변으로 활자가 날아올랐다. 유중혁은 본능적으로 지금이 환상의 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분명 그토록 바라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무의미했다. 그는 흰 코트를 걸친 채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다시 원래의 지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바라던 이야기의 끝을 보기 위해서.
